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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 - 이 책을 읽는 분들께

by 탄천사랑 2008. 10. 4.

·「최웅빈 - 관포지교」



이 책을 읽는 분들께

<사기史記>에서는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관중管仲은 영수潁水 안휘성安徽省 사람으로 자는 이오夷吾이다.
젊을 때부터 포숙鮑叔과 교제하였는데 포숙은 관중의 사람됨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관중은 가난 때문에 포숙을 자주 속였는데 포숙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언제나 친밀함을 유지했다.
관중은 공자 규를 섬겼고 포숙은 제나라의 공가 소백小白을 섬겼다.
소백이 왕위에 올라 환공桓公이 된 후, 공자 규는 죽고 관중은 체포되었다.

포숙은 환공에게 관중을 추천하였다.
관중은 포숙의 힘으로 채용되어 
제나라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며 제나라 환공을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
제후들을 단합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관중의 계락에 의해서였다.
관중은 말하기를,

"내가 가난할 때에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많이 가졌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 탓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가난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포숙을 위해서 사업을 계획했다가 실패하여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나 포숙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나를 비방하지 않았다.
 일이 되는 떄와 되지 않는 때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차례 채용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주군에게 쫓겨났다.
 그럼에도 포숙은 나를 무능한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기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몇 번이나 싸움터에서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포숙은 나를 비겁한 자라고 욕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미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자 규糾가 패하고 소흘召忽이 죽었을 때 나는 붙잡혀 죄인의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포숙은 *******나에개 수치를 모르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쓸데없는 절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이 서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낳아 준이는 내 부모지만 진정으로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군鮑君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한 후 그의 아래에 있었다.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 봉록을 받고 영지를 10여 대나 보전하여 언제나 명대부名大夫로 알려졌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내세우기보다는 관중의 사람됨을 볼 줄 알고,
끝까지 관중을 신뢰하였던 포숙의 인품을 더 높이 평가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유명한 시 
'빈교행貧交行' 에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손을 펴서 구름을 부르고 손을 뒤집어서 비를 부르네
  경박한 사람의 수를 헤아려 무엇하랴.
  보라, 관중이 빈곤했을 때의 포숙의 우정을,
  이렇게 아름다운 우정의 도를 사람들은 흙과 같이 여겨버리네.

그러나 중국에 있어서의 '관중'은 옛부터 사상가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그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관중에게 '인자仁子'라는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고,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오랑캐의 지배하에 놓여 있어 
 피발좌임被髮左衽을 하고 잇었을 것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공자는 관중을 마치 구세주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 (被髮左衽-길게 풀어 헤친 머리에 왼쪽으로 옷을 여며 입는 것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뜻함)

그리고 <삼국지三國志> 에서 제갈공명이 관중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유명하다.
특히 근대 이후에 와서 관중은 크게 주목을 받아 
중국에서는 그의 사상이 은연중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보면 중국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유교나 제자백가의 사상 뒷면의 실천적인 정치사상으로서 
진가를 발휘해 온 것은 역시 관중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 창고가 가득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불멸의 사상으로서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후 미국의 실용주의 Pragmatism가 한때 세상을 풍미한 적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2천 년 전에 이미 백성의 생활을 걱정하고 현실에 입각하여 사물을 보는 
관중이 나와 그 영향이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관중과 포숙의 아름다운 우정은 오늘날 극도로 황폐화된 인간관계에 신선한 충격을 줌과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 이 글은 <관포지교>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최웅빈 - 관포지교
선비 - 1991. 09. 01.

[t-08.10.04.  201017-16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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