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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유아 어린이/쉼터

까트린 이야기 - 1

by 탄천사랑 2008. 2. 14.

·「빠트릭 모디아노 - 까트린 이야기」




지금 뉴욕엔 눈이 내리고, 나는 59번 거리 내 아파트 창문 밖으로 맞은편 건물을 건너다보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무용 학원이 들어 있는 건물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무용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몸에 착 달라붙는 무용복을 입은 학생들이 
발끝을 디디며 추는 뿌앵뜨와 공중에 뛰어올라 발을 맞부딪는 앙트르샤 연습을 중단했다. 
보조 강사로 내 일을 돕고 있는 딸아이가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 줄 양으로
재즈 음악에 맞춘 스텝을 보여 주고 있다.

조금 후에 나도 저 아이들을 보러 건너갈 것이다.
우리 학생들 가운데 안경을 쓴 여자 아이가 하나 있다. 
그 아이는 강습이 시작되기 전에 안경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춘다. 
같은 나이에 내가 디스마일로바 선생님 학원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도 안경을 쓰고 춤을 추지는 않는다. 
디스마일로바 선생님에게서 무용을 배우던 시절, 
저녁에 있을 무용 강습을 생각해서 낮 동 안에 안경을 쓰지 않고 지내는 훈련을 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사람과 사물 의 윤곽이 예리함을 잃으면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고 소리마저도 점점 둔탁해졌다. 
안경을 쓰지 않고 보면, 
세상은 더 이상 꺼슬꺼슬하지 않았고, 
뺨을 대면 스르르 잠을 불러 오던 내 커다란 새털 베개만큼이나 포근하고 보들보들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빠는 이렇게 묻곤 했다.
"카트린, 무슨 생각 하고 있니? 안경을 쓰는 게 좋겠구나"

아빠 말에 따라 안경을 쓰면 세상의 모든 것이 여느 때처럼 다시 딱딱해지고 또렷또렷 해졌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였고,
나는 더 이상 몽상에 잠길 수 없었다.

여기 뉴욕에서 나는 몇 해 동안 어떤 발레단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함께 무용 학원을 차렸고, 어머니가 일을 그만 두신 뒤로 혼자서 학원을 운영했다.
이젠 내 딸이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아버지도 일을 그만 두실 때가 되었지만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시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일을 그만두신다면, 대관절 어떤 일을 그만두시는 걸까?
나는 아빠의 직업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았던 적이 없다.
아빠와 엄마는 이제 그리니치 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에 정착하셨다.
따지고 보면, 우리 세 식구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이야깃 거리가 없다.
많고 많은 뉴욕 사람들과 하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 한 가지 조금 남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에 파리 10구에서 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지금으로 부터 거의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이 글은 <까트린 이야기>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빠트릭 모디아노 - 까트린 이야기
역자 - 이세욱
열린책들 - 1996. 07. 20.

 [t-08.02.14.  20210218-162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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