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載龍 - 「분노의 시대 그리고 사색」
'무서리가 들풀을 덮으니 이로써 또 한 해를 마치누나(疑霜被野草 歲暮亦云己)'는 어느 시인의 한탄처럼
아침 출근길 두텁게 서린 車窓(차창)의 서리를 보고 겨울이 깊어감을 알겠고
예년과는 달리 스산한 명동의 거리 표정에서도 정녕 세모(歲暮)를 느끼게 한다.
왜 사람들은 유장(悠長)히 흐르는 세월을 두고 굳이 단절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인지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아쉬운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아서 바쁜 척이라도 해야만 된다.
그런데 금년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좁은 시야로는 아쉬울 것도 바뿔 것도 별반 없어 보이니
천하가 태평스러운 것도 아닌데 기이한 느낌이 아닐 수 없다.
하기사 금년처럼 사건도 많고 사고도 많아서 '하루도 신문을 안보면 사는데 지장이 있다'는 익살처럼
어서 빨리 이 불운한 해가 갔으면 하는 지겨움은 이해가 가나
바쁠 게 없다는 데에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에 복덕방이 한가한 것은 국민경제를 위해서도 매우 다행한 일이겠으나
한창 바빠야 할 시간대에 사우나탕 휴게실은 비지니스맨으로 만원을 이루고
연말대목으로 북적대야할 시장과 상가는
구경만 하러 들어가도 친정아버지처럼 반기니 서비스 향상되었다고 좋아할 계제가 아니다.
정치한다는 친구도 재미있는 건수 좀 없겠느냐고 전화하는 것 보면 바쁠 게 없는 것 같고
연말 연시 선물 안받기 정화운동하는 공직자도 정작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괜스리 바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모두 우리 주변 이야기이고 정작 애간장이 녹는 것은 우리의 밥줄이 달린 증권시장이다.
그렇지 않아도 5년여의 침체로 녹초가 된 마당에 장여인 사건, 명성 사건, 영동개발진흥사건 등
큰 건수가 터질 때마다 그 온상은 모두가 증권시장인 양 동네북처럼 맞으니 반신불수가 될 수 밖에 없고
연말에는 그래도 설마하던 한 가닥 배당투자 희망이 '고을배당은 국민적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높은 어른의 한마디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자니 조석으로 대하는 직원들의 어깨는 늘어지고 왁자지껄해야할 객장에는 인영(人影)이 불견(不見)이다.
참으로 답답하다.
이 사회를 덮고 있는 무기력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탈출구는 없는 것인가?
어느 땐가 바쁘다 바빠 하던 그 활력과 생동감은 어디에 잠자고 있다는 것인가?
尹東柱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닥아올 아침을' 기다리듯
정녕 이 해도 어두워가는 세모의 거리에서 내년은 제발 좋은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구하고 싶다.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노니
증권회사 다니는 똘이 아빠,
퇴근길에 들르는 대포집 박씨,
대왕코너에서 옷장사하는 우리 고모,
시청에 다니는 영이 삼춘,
그저 이 사람들이 갑자년 내년에는 운수대통하여 어깨는 신바람이 나고
아랫도리에서는 요령소리가 나게만 제발 덕분해 주십시오" (p176)
- 1983. 12.
※ 이 글은 <분노의 시대 그리고 사색>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金載龍 - 분노의 시대 그리고 사색
다원아트링크 - 1993.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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