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 「눈을 감고 보는 길」
12월을 저는 '신의 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것의 결산의 달인 것도 그렇고 파랗게 여믄 청냉한 하늘 표정 또한 그렇습니다.
잎을 남김없이 모두 지운 나무들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것하며
밤하늘에 별들이 또록또록히 눈을 밝히고 있는 것도 범상치 않은 표정이지요.
엄동이긴 하지만 청냉한 기운이 있어 감히 수작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기품이 있는 달,
그러기에 노인들의 눈동자조차도 맑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기품 있는 12월이 좋습니다.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칼바람이 목덜미를 휘감아도 '누가 항복할 줄 알아'하며 목을 곧추세우고 걷는 걸음에는 투지가 있지 않던가요?
포장마차에서 마신 소주 몇 잔으로 엄동을 다스리는 가난이 위대해 보이는 것도
역설적이기는 합니다만 이 계절의 힘입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만 언젠가 산사에 들었을 때
노스님이 볕 잘 드는 마루에 앉아서 내의를 뒤적이고 있어 무엇하고 계시냐고 했더니
이를 잡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한쪽에서는 깎은 머리가 파아래 보이는 사미승이 깨어진 바가지를 깁고 있었고요.
이런 청빈한 모습이 돋보이는 것도 이 계절의 힘 아니겠습니까?
첫 아이를 얻었을 적의 일입니다.
점심나절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의 첫눈이.
저는 문득 이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눈(雪)을 보게 될 아기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두말 않고 조퇴를 신청해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단걸음에 집으로 가니 아기는 세상 모르고 포대기 속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기를 흔들어서 아기의 잠을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이내 아기가 그 까만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신가하게도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방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기가 듣건 말건 말하였습니다.
"자, 봐라. 이것이 이 세상의 눈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가볍고 하얗니?
어디 한 번 우리 맞아 볼래?"
저는 아기를 품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첫 눈이 이 세상 첫 아기의 볼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눈을 들어다보던 저는
새삼스럽게 아기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흑진주라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는데 아기의 눈동자처럼 맑고 빛나는 흑진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흑진주 속에 들어 있는 동그란 점 같은 나의 상반신.
저는 문득 때묻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기의 천진무구한 눈동자 바다에서 멱을 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아. 그것은 환희였습니다.
내가 당신과 눈싸움을 하자고 한 적이 있지요?
그것은 어렸을 적에 동무들과 곧잘 벌였던 눈싸움의 복습이라기 보다는
내 모습이 당신의 눈동자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맑은 눈동자 속에 자신이 담겨져 있는 것을 그윽이 바라봄은 행복입니다.
아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언젠가 사무실의 창 밖을 무심히 내다보다 말고
빙그래 웃으며 구경하는 것조차도 행복한 정경이 있어 마음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젊은 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연인들처럼 허리가 으스러져라 팔을 감고 가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상대방의 청바지 뒷주머니 X자로 손을 집어 넣고 걸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정경은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며 걸어가기 위해 뒷걸음질로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상대를 사랑하면 걸어가는 그 사이에도 얼굴을 마주보며 빙글거리고 싶어질까 생각해 보세요.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가요?
저는 정호승 시인한테서 직접들었습니다.
아기를 보다 말고 아기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든 표현해 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국어사전에서 '눈부처'라는 너무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내게 되었노라고.
곧 눈부처라는 말은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 동인(瞳人), 동자(瞳子)란 뜻이라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또 한 사람의 모습을 '눈 속에 앉아 있는 부처'로 표현한 선인의 아름다운
마음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종호순 시인은 고백했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바다보다 더 넓고 바다보다 더 깊은 데가 눈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담고, 바다를 담을 수 있는 것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 겨울,
이 12월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윽히 들여다보는 이웃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이웃 중에 하나이고 싶습니다.
촛불 밝혀진 탁자 건너편의 당신의 눈동자 속에 든 저의 눈부처, 그것은 틀림없는 행복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눈부처'라는 시를 오늘치 사랑의 양식으로 옮겨 드림니다. (p105)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의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느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녘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이 글은 <눈을 감고 보는 길>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채봉 - 눈을 감고 보는 길
샘터(샘터사) - 1999.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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