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 경요/모아 1992. 05. 26.
제1부. 상실의 늪
그의 서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큰 책상 하나와 소파, 그리고 벽에 위치한 책장뿐이었다.
단순하고 환하게 배치되어 있어 정결한 느낌이었고,
일목 요원하게 끼어 있는 책장의 책들은 주인의 독서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씨 댁이 차를 가져온 후 방문을 닫고 나가자 실내에는 정적만이 흘렸다.
양일주는 불안한 모습으로 서재를 서성이다 적현문 앞에 다가 앉으며, 담배를 권했다.
적현문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고, 실내는 침묵과 두 사람이 피운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양일주는 어디서부터 서두를 꺼내야 할지 모르는 듯했고. 적현문 역시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얼마 후 양일주는 길게 담배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자네는 소설을 쓸 뿐 아니라, 책 읽기도 무척 좋아하지.
하지만 자네네는 종종 책이 사람을 해치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안 드나?"
적현문이 미소 지었다.
"제가 본 영화 속에서 책들은
인간의 머리를 괴롭히는 금품으로 취급되어 소방대가 불을 끄는 게 아니라 책을 불태우고 다녔었죠.
물론 가상 물이긴 했지만요."
"정말 그러네."
양일주는 다소 흥분한 듯했다.
"책이란 것은 참 이상한 물건이야.
없으면, 인류는 바보가 돼버리고, 있으면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갖 고통의 근원이 돼버리지."
"그것은 모순이지요.
책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물질문명들이 좋고 나쁜 양면을 갖는 모순 덩어리라 할 수 있겠죠."
적현문이 담배를 내뿜으며 깊게 양 일주를 쳐다본 채 계속 말했다.
"만약 말씀하신 책이 문학작품만을 가리킨 것이라면,
전 향시 그것을 사치품으로 여겨왔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는 사람만이 문학 속에 빠져 많은 시간을 정신세계에 투자하죠.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죠."
그는 또 고개를 저였다.
"하지만 책에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죠.
일단 몰입하면 서러움과 기쁨 그리고 고통 등 각종 인생의 경험을 그 속에서 경험할 수 있으니까요."
"그 경험이라는 게 좋은 것인가?"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죠. 하지만 나 뿔 수도 있죠.
똑같은 책을 보고서도 서로 느끼는 감정은 다르니까요."
"그게 자네가 말하는 모순이겠지. 안 그런가?"
적현문이 웃으며 말했다.
"저와 하실 말씀이 책에 관한 토론이었습니까?"
"그게..., 물론 그런 것은 아닐세...,"
양 일주가 긴 한숨을 토하며 웃음을 띠었다.
"그저 난 심홍의 그 책 때문에 상처를 받고 다친 것 같아서 그러네."
"그럴리가요?
제가 보기에 심홍은 책 속에 나온 것들을
자신의 견해와 깊이에 맞게 받아들여 자신의 세계에 축적할 줄 아는 것 같았습니다."
"자네는 좋은 면만 본 걸세.
하지만 또 다른 단면은 어떤가?
그 애는 인생을 한 편의 시로 생각하면서 꿈꾸기를 좋아하고 비현실적이며 항시 감정에 빠져 우울해하네."
"그것은 꼭 책 때문이라 할 수 없는 문제 같습니다.
심홍은 아직 소녀고, 그 증세는 소녀들이면 누구나 갖는 것들이죠," - p77
※ 이 글은 <은하수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7.01. 20230710_17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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