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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藝術家)와 지조(志操) - 오지호 (吳之湖)

by 탄천의 책사랑 2007. 6. 4.

 

 

 

批點評解 韓國隨筆精選 - 關東出版社 / 1976. 05. 20.

소극적 표현으로써 예술 (藝術)의 특질 (特質)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타협을 불허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오직 미 (美)만을 추구하고, 추 (醜)와도 타협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다른 사회적 활동과 구별되는 예술의 특질이다.

이는 마치 과학이 오직 진리 (眞理)만을 상대로 하고, 여하한 비진리 (非眞理)와도 야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예술이 추 (醜)와 타협할 때 그것은 우상 (偶像)은 될 수 있으되 이미 예술은 아니다. 
만일 과학이 비진리와 타협할 때 그것은 미신 (迷信)은 될 수 있으되 이미 과학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술에는 오직 「철저(徹底)」가 있을 뿐이요, 「애매(曖昧)」가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오직 「결단(決斷)」이 있을 뿐이요, 「준순(逡巡)」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예술을, 그의 전 생활로 하는 예술가에 있어,  
예술의 본질은 곧, 그의 인간적 성질로 화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참 예술가이면, 완전 (完全)이 아니면, 차라리 무 (無)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뒤집어 말한다면,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만이 참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추호의 타협도 불허하는 서릿발 같은 예술가를 가리켜 기인, 고집불통 등의 말로 부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오직 타협만이 유일의 생활방법이 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성격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도 또한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와 같은 비타협적 성격,
즉 자기의 소신을 끝까지 관철하려고 하는 이 강력한 심성이야말로,
예술로 하여금 절대성을 갖게 하는 원리인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예술사상 (藝術史上)의 허다한 사실 (史實)로써 증명할 수 있다.
가까운 예로서, 19세기 말엽에 배출된 일련의 천재를 보라.
고호, 고갱, 루소, 세잔느 등. 
 
그들의 절세 (絶世)의 천재와 정열과 또 그들의 위대한 일들에 대하여,
당시의 프랑스 사회는 여하히 보답하였던가. 
갖은 비방과 조소와 모욕으로써 그들을 정신적으로 질식케 하였다.
물질적으로 기아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환경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소신에 반하는 모든 것과 타협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갈래길,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로 곧장 나아갔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인류의 역사 위에, 후광이 찬연하고 최고 최귀의 수많은 보배들을 그들은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들이 이와 같은 형극의 길을 걷고 있는 동안, 
다른 일방 (一方)에서는 권력 앞에 아유(阿諛, 언덕 아, 아첨할 유)하는 것으로 얻은 
'아카데미'라는 상아탑에서 일대 (一代)의 권세와 영화를 즐기던 수많은 예술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예술은커녕 그들의 이름조차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옳은 길을 밟기 위하여, 
여하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고,
여하한 폭력 앞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한 갈래 길로만 나아가는 심적 태도 (心的 態度)를 가리켜 지조 (志操)라고 부른다면, 
예술에 순 (殉, 따라 죽을 순)한 고흐 등의 태도는 예술가적 지조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예술가의 하나의 본질적인 성질이 되어 있는 지조는
반드시 예술활동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사회적 활동에도 발현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추 (醜)와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은 같은 이치에서 악 (惡)과도 타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 批點評解 韓國隨筆精選에서 

[t-07.06.04.  20210604_18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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