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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성장교육(인문.철학.교양./부부로 산다는 것

1 - 003 서로의 역활을 바꿔보는 것

by 탄천사랑 2007. 6. 3.

·「최정미 외  - 부부로 산다는 것」

 

003.

서로의 역할을 바꿔보는 것
"난 여자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9시 뉴스를 보다가 딸이 말했다.
뉴스에서는 생활고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한 가장의 안타까운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왜?"  딸애가 대답했다.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고, 여자는 남자처럼 평생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잖아."
남편이 
"맞다, 맞다" 하면서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기분이 상했다. 
어이가 없었다.
결혼 3년 만에 힘들게 얻은 딸. 
병약해서 잔손 치레가 많은 자기를 키우느라 회사에 사표를 던진 엄마의 깊은 뜻도 모르는 철부지 딸, 
아이는 늘 집에만 있는 그녀의 모습이 결혼한 대부분 여자들의 삶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물었다.

"왜 여자는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우려했던 대답이 나왔다.
"엄마는 일하지 않고도 아빠가 벌어오는 돈만 쓰면서 집에서 편하게 있잖아."

딸은 얼마 전에도 무슨 얘기 끝에 그랬었다.

"엄마가 뭐가 힘들어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서 ..."

그때 바로잡지 못하고 대충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한데 그의 반응이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건 그래! 여자가 얼마나 편하냐? 
  아빠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엄마처럼 결혼만 잘하면 평생 집에서 편하게 놀고 먹고..."

그는 남자만 힘들게 바깥일을 하는 불공평함에 대해 피를 토하는 듯한(?)
열띤 설명을 딸에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단순한 호기를 넘어 '내 이것들한테 뭔가를 기필코 보여주리라'라는 굳은 결의가 치솟았다.
물론 그의 단순한 농담쯤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아이가 전업주부의 노고에 관해 한참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였다. 
그도 장난이라지만 심한 것 같았다.

그녀는 다음날 당장 일거리를 얻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을 했고,
마침내 아르바이트를 나가기로 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일을 하는데, 우선은 너무 늦지 않은 퇴근시간이 맘에 들었다.
아르바이트이기에 원할 때는 언제든 쉴 수 있다는 이점도 좋았다.

그와 아이에게 얘기를 하니, 예상외로 둘 다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래? 정말 좋은 일이네. 그럼 내가 집안 일을 도와야지.
  당신이 좀 더 빨리 바깥일을 하지 않은 것이 그동안 아쉬웠거든.
  당신처럼 능력 있는 여자가 말이야."
"다른 애들 엄마도 직장에 나가니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시고
  맘대로 놀 수 있어서 좋다고 하던데. 
  엄마, 나도 맛있는 거 많이 사줘."

부녀는 그녀의 부재에 대해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디 두고 보자, 이것들.'
드디어 그 다음날!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 밥을 챙겨 먹이고,
남편과 아이를 보낸 뒤 간단한 집안 청소를 마치고 첫 출근을 했다.
아르바이트에는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일도 지루하지 않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하니까 재미도 있었다.
모처럼 활기를 느끼며 그동안 잊고 살았던 새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에는 일이 손에 익지 않아 다소 서투르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일은 어디 쉬운가?
집안 일도 프로 의식을 갖고 제대로 해내려면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그동안 집안 일 야무지게 하며 익혀둔 근성으로 날렵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 내는
그녀의 솜씨에 회사 측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출근 첫날은 남편과 아이가 그런대로 그녀의 빈자리를 무난히 채우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야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반짝반짝 윤이 나던 집안은 간 곳 없이
쓰레기 더미와 각종 살림살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발로 걷어차고 다녀야 할 지경이 됐다.

수시로 씻기는 엄마의 야무진 손매 덕분에 항상 반질반질 윤이 나던 딸은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남편은?
집안일을 도와주겠다던 공약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양말이 없네, 셔츠가 없네" 하며 볼멘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딸은 그녀가 바깥일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녀의 부재를 절감하는 것 같았다.

"엄마! 학교 갔다가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없으니까 너무 쓸쓸해." 그녀가 못 이기는 척 
"그럼 다시 집에만 있을까?" 라며 의중을 떠보니 남편과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반색을 했다.
"엄마, 엄마가 얼마나 위대한지 이제 알겠어.
  그러니까 엄마, 밖에 나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 응?"

남편이 말했다.

"집안일이 표도 나지 않는 것 같아서 쉬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이거 정말 중노동이야. 내가 전에 농담한 거 사과할게. 미안해."



사람의 심리란 게 그렇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소중하고 어려우며, 그 외의 일은 별것 아니고 쉬워 보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불만이 있다면, 단 며칠만이라도 역할을 바꿔보세요.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절감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부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603.  20210604-18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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