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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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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

by 탄천사랑 2007. 5. 27.

·「茶人 제 96호 2006. 05/06」 

 

 

다가의 인간상.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
봄도 장차 저물어 가는데 숲속으로 들어가니 굽은 길은 어슴푸레 뚫려 있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들꽃은 향기를 뿜어내고 산새들도 즐겁게 지저귄다.
거문고를 안고 바위에 앉아 두서너 곡을 타니, 심신은 변하여 통천(洞川)의 신선인 듯, 그림 속의 사람인 듯.

뽕나무 밭과 보리밭은 위아래에서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고, 
장끼는 따스한 봄볕 속에 짝을 부르고, 비둘기는 아침 보슬비 속에 노래한다. 
전원에 묻혀 사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참다운 경치란 이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때로는 스님과 함께 솔밭 바위에 앉아 인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공안 (公案)에 대하여 설왕설래하다 보면 어느덧 시간은 흘러 소나무가지 끝에 달이 걸린다. 
이윽고 길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한께 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키는 대로 이야기하다가 그것도 따분해지면 바위 끝에 벌렁 누워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본다. 
그러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밀려와 스스로 유유자적의 길을 노닐게 된다.

문을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 하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추구해야 할 세 가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살구꽃에 성긴 비가 듣고 버드나무에 산들바람이 불 때, 흥이 나면 흔연히 홀로 길을 나선다.

분주한 세상 밖에서 한가로움을 맛보고, 
부족한 시간 속에 살면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은둔 생활의 정취요, 
봄날 잔설을 쓸어내고 꽃씨를 뿌리는 것과 밤에 향을 피워 놓고 예언서를 보는 것은 은둔생활의 또 다른 기쁨이다.
문필생활은 흉년을 모르고 술이 있는 곳은 언제나 봄, 이것이 은둔생활의 참다운 맛이다..

쾌적한 밤 편안히 앉아 등불에 엷은 비단을 씌워 불빛을 은은히 밝히고 차를 끓인다.
밤은 깊어 아무 소리도 없이 사위가 그저 적막하기만 한데 개울물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이런 밤 이부자리를 펴기 전에 잠시 책을 보는 것, 이것이 은둔생활의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은 대문을 닫고 방 청소를 한다. 
문밖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이미 끊어져 사방은 고요하고 실내 또한 적막하다.
이럴 때 앞에 가득히 쌓인 책 가운데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뽑아서 펼쳐본다.
이것이 은둔생활의 두 번째 즐거움이다.

텅 빈 산 속에 한 해가 저무는데 고운 눈발은 사방으로 흩날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조차 바람에 몸을 떤다.
추위에 놀란 새들이 들판에서 우는데 빈방에서 질화로를 기고 앉아 있노라니, 
차는 끓어 향기롭고 술은 익어 그윽하다.
이것이 은둔 생활의 세 번째 즐거움이다.

초여름 어느 날, 집에서 가까운 숲으로 들어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이끼를 쓸고 바위에 앉아 본다. 
대나무 그늘 사이로는 햇빛이 떨어지고, 오동나무 그림자는 구름 모양을 하고 있다. 
얼마 뒤 산에서 구름이 일어 가랑비를 뿌리더니 문득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의자에 기대어 오수에 잠기니 꿈속의 정취 또한 현실과 과히 다르지 않다.

 

한국고전명수필선 / 신흠의 <숨어사는 선비의 즐거움> 중에서  
신흠(申欽 1566-1628) 은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상촌(象忖).
영의정을 지낸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한문 대가이다. 저서에 《상촌집》이 있다.

글 - 신흠
출처 - 茶人 제 96호 2006. 05/06 

[t-07.05.27.  20220501-14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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