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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책방(소설/황경신-초콜릿 우체국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런치 박스세트

by 탄천사랑 2007. 4. 23.

·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와 헤어지고 싶어 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문제였다.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한 달 전,  따뜻한 햇살이 켜켜이 쌓여가기 시작하던 봄날의 초입에 만났다. 
하늘은 푸르고 들판은 온통 연두빛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감지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그녀에게 있었고,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파릇파릇한 봄의 강가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혹시 서울로 가는 막차가 몇 시에 끊기는지 아세요?"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녀였다. 
그는 서울로 가는 막차의 출발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또한 그 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막차를 타기 위해 좁은 대합실에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았다.

"저 혹시,"  그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 배고프지 않으세요?"

그는 순간 무척 당황했다. 
배가 고픈 건 사실이었다. 아까부터 위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먹을 것을 넣어달라'라는 신호를 계속하여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그녀의 귀까지 이른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그에게는 서울로 돌아가는 차표 한 장을 살수 있는 돈밖에 없었고, 
그마저 이제 거칠거칠한 차표로 바뀌어버렸다.

'배가 고프다고 할까. 
 그랬다가 뭘 먹으러 가자고 하면 어쩌나. 
 아직 막차가 출발할 시간은 30분 정도 남아 있으니 시간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진 못할 텐데.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밥을 사달라는 소리는 못하지. 
 죽어도 못하지.'

그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조용히 도시락 하나를 내밀었다.
뚜껑을 열자 색색 가지 음식들이 그를 향해 다소곳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도시락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그가 물었다.

"두 개를 사 왔는데, 한 개는 제가 먹었어요."

그녀는 가방에서 예쁜 케이스에든 젓가락 한 쌍을 꺼내면 그렇게 말했다. 
일회용 나무젓가락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격한 그는, 
그녀가 왜 혼자  이곳에 왔는지, 
그런데 왜 도시락은 두 개를 싸왔는지, 이유 따위야 어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제가 먹어도 됩니까?"

노란 달걀말이와 빨간 새우구이와 초록색 오이절임, 
윤기 흐르는 장조림과 노릇노릇 한 호박전, 
그리고 온갖 잡곡이 들어간 보슬보슬한 밥을 향해 젓가락을 뻗으면, 그가 말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가방에서 또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생수통에 담긴 물이었다. 
그가 도시락을 다 비울 때까지, 그녀는 즐거운 듯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그가 음식을 흘리면 휴지를 꺼내 닦아주고, 
그가 목이 막혀하는 듯하면 물을 건네주면서.

배고품이 사라지자.  그는 어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이유들이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막차가 도착했다. 
차가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고,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를 놓쳐버렸다.

'하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피곤한데다 배가 불렀던 그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가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요?"

하고 그녀가 되물은 것도 계산 밖의 일이지만, 
처음 만난 남자에게 자신이 만들어온 도시락을 먹이고, 
즐거운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면, 
관심이 있다는 게 아닌가, 
전화번호는 당연히 가르쳐 주겠지,라는 것은 라는것은 오직 그만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왜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말을 재빨리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 ... 아, 뭔가 보답을 하고 싶어서요. 
 도시락을 얻어먹었으니까....."
"전 괜찮은데...." 

그녀가 말했고, 
그는 다음 말을 또 찾아야 했다.

"번호를 알려주기 곤란하다면, 아예 약속을 잡을까요? 
 내일은 어때요? 
 저녁이 싫으시면 점심도 좋고...."  그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럼 모레 점심때...."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부터,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씩 데이트를 했다. 
적어도 그는 데이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딘가 기묘한 데이트였다. 
두 사람은 언제나 야외에서 만났다. 
밤에도 낮에도 평일에도, 
휴일에도, 
고궁이나 한강 고수부지, 공원, 아니면 학교의 캠퍼스가 그들이 데이트 장소였다. 

그녀는 늘 도시락을 싸왔다. 
조금씩 그 내용물이 달라졌지만, 언제나 맛있고 정성이 가득한 도시락이었다. 
그는 그녀를, 그리고 그녀의 도시락을 사랑했다. 
그는 항상 도시락을 깨끗이 비웠고 그녀는 늘 그런 그를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그와 그녀는, 
만나서, 도시락을 먹고, 헤어졌다. 
영화도 콘서트도 카페도 술집도, 그는 그녀와 함께 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전혀 먹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헤어지고 나서 보니 그는 그녀의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있었다. 
언제나 헤어지기 전에 다음에 만날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은 한 번도 틀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짧은 봄날에서 그녀가 사라졌고, 도시락이 사라졌다. 
그는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석하려 했다.

그의 가정은 이렇다.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눈빛이 강렬하고 시니컬한 애인과 함께 봄날의 초임, 강가를 찾았다. 
하지만 뭔가 다툼이 있어서 헤어지게 되었고, 
애인에게 주려던 도시락을 우연히 발견한 자신에게 준 것이다. 
그녀의 취미는 요리였고,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그에게 호감을 느껴 몇 번 만났지만. 
그녀를 버린 애인이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그에게 헤어지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렇다. 
그녀는 도시락을 판매하는 회사의 아르바이트생으로, 
회사의 신제품을 무작위로 선정한 시민들에게 시식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좀처럼 그 일을 해내지 못하다가, 
어느 날 훌쩍 봄날의 강가로 떠났는데, 
무척 배가 고파 보이는 남자를 만나 그를 실험 대상으로 심기로 작정하고, 
일주일에 두 번 신제품 도시락을 그에게 먹인 후, 반응을 살핀 것이다. 
이제 그 회사에서는 <런치 박스세트>라는 신제품을 전국에 유통시키게 되었고, 
그녀는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이 짧은 봄날의 에피소드에서 숨겨진 진실이 하나 더 있다. 
라면 하나 제대로 끓이지 못했던 그녀가, 그와 헤어진 직후 요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봄, 
두 사람은 봄날의 강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녀가 만든<런치 박스세트>를 먹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초콜릿 우체국>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저자 - 초콜릿 우체국
저자 - 황경신
북하우스 - 2004. 06. 17.

[t-07.04.23.  190702-18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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