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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황경신-초콜릿 우체국

초콜릿 우체국 - 소나기

by 탄천사랑 2007. 4. 25.

·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

 

 

소나기

그 날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어.
원래 계획대로라면, 난 아침 열시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가고 있어야 했거든.
하지만 같이 가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해버렸어.
그것도 그날 새벽 세 시에 말야. 그 친구 다 좋은 데, 변덛이 좀 심하다는 게 흠이야.

그런 친구랑 여행 계획을 새우다니.
그러게 말야.
그래서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어.
새벽 세 시에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받고서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네 시쯤에야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까 오후가 됐지 뭐야. 어짜피 할 일도 없었지만, 
배는 고픈데 꼼짝도 하기 싫어서 자장면이나 시켜먹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거의 매일 문 앞에 붙어 있던 중국집 전단지가 그날따라 하나도 안 보였어.
밖으로 나가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겨우 한 장을 주워서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켰지.

너 원래 자장면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응, 
집에서 뭘 시켜먹는 일도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랬어.
그런데 이놈의 자장면이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아.  다시 전화를 했더니.....,

지금 막 떠났다고 그러지?
아니. 
비가 와서 주문이 왕창 밀렸다나.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 사이에 밖에서 비가 오고 있더라.
화가 나기보다는 너무 지쳐서 안 먹겠다고 했지.
냉장고를 뒤져보니까 전에 사다놓은 칼국수가 있었어.
그런데 이게 유통기한을 이미 넘긴 거야.
할 수 없이 우유 한 잔 마시고 되는 대로 걸쳐 입고 전철을 탔어.

어디로 갈려고?
어디든지 갑자기 집에서 퍼져 있는 게 싫어졌거든.
계획대로라면 그때쯤 동해 바다를 싫증날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어야 하는데 말야.
한참 전철을 타고 가다가, 아주 오래전에 한 번 가봤던 곳에서 내리기로 했어.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말야.

무슨생각?
음.... 글쎄, 아주 아팠던 사랑을 어렵게 끝낸 곳이라고 할까.....,
뭐 그 정도로 해두자. 얘기하려면 복잡해지니까.
여하튼 그곳에서 내렸는데, 표 내는 곳 앞에서 지갑이 없어진 걸 알게 된 거야.

지갑이 없어져?
아마 전철 안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
말했잖아. 그 날은 죄다 엉망진창이었다고.

쯧쯧... 소매치기를 당했나 보구나. 그래서 어떻게 했어?
어쩌긴.
역무원 아저씨에게 이야기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고,
내 말을 믿어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냥 빠져 나와서 막 뛰었지.
뒤에서 누가 소리를 친 것 같았는데, 그냥 뛰었어.
밖에 나와 보니까 비는 계속 내리고 있는데, 우산까지 전철 안에 놓고 내렸던 거야.

설상가상이네
핸드폰으로 친구들에게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몇 명은 통화가 안 되고 몇 명은 내가 있는 곳으로 올 형편이 안 되고... 그런 식이었지.
핸드폰 배터리도 떨어져가더라고, 그러다 겨우 한 명과 연락이 됐어.
자기가 올 때까지 가까운 카페에라도 들어가 있으래.
두리번 거리는데 언젠가 딱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카페가 바로 앞에 있는 거야.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그곳에 들어갔어.
그리고 친구가 오기를 가다렸지.

설마 그 친구에게까지 바람맞은 건 아니겠지?
친구는 한 시간쯤 지나서 왔어. 문제는 그 사이에 생긴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곳에서 그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이라니?
언젠가 그곳에 같이 갔던 사람.

그곳은 딱 한 번 갔다며?
응. 
그래. 딱 한 번 같이 갔던 사람.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아야? 좀 자세히 얘기해봐.
그 카페는, 좀 어두웠어.
2층에 있긴 했지만 비도 오고 날도 이미 저문데다가, 조명이 그리 밝지 않았거든.
테이블이 몇 개 있긴 했지만 두세 명이 바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도 거기 앉았지.
바텐더가 주문을 받으러 왔어.
친구도 곧 온다고 했고, 그냥 앉아 있기도 그래서 맥주를 한 병 시켰어.
그랬더니 <Rain Shower> 라는 이름의, 처음 보는 맥주를 갖다주는 거야.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가버렸어.
다시 부를까, 하다가 맥주병이 너무 예뻐서 한 번 마셔보기로 했지.

맛있었어?
글쎄.... 아주 인상적인 맛이었어.
처음에는 약간 달콤한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쌉쌀한 맛이 돌고, 
독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지.
그런데 이상한 건, 맥주가 목으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그 맛이 아련해져버리는 거야.

맛이 아련해져?
분명히 뚜렷한 맛이 있었는데 그 맛이 금세 녹아버려.
그래서 또 한 모금을 마시게 돼. 어떤 맛이었더라, 하면서.

.... 특이하네
그런 식으로 한 병을 다 마셨는데 십 분밖에 안 지난 거야.
친구가 오려면 좀 더 있어야 하니까, 또 한 병을 더 시켰어.  
그걸 다 마시고 잠깐 망설이고 있는데....,
 
더 마실까 하고?
응. 
언제부터가 내 바로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
숨이 멎을 뻔했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
처음에는 정말로 그 사람인 줄 알았어.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하나, 
갈팡질팡하는데 그 사람이 다시 고개를 돌리더라.
옆모습을 보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거야. 
한숨이 나왔지.

왜?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고, 
가만히 보니까 그사람도 나랑 똑같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
테이블 위에 <Rain Shower> 두 병이 놓여 있었지.
그리고 세 번째 맥주를 주문했어. 난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어.
언제쯤 도착하는 지도 알고 싶었고, 맥주를 조금 더 마셔도 괜찮은지 물어보고도 싶었거든.
그런데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져버렸어.
배터리가 다 된거지.

그래서?
여하튼 친구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
그렇지만 맥주에 대한 이야기는 하다 말았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 몰랐지.
그때 남자가 내 쪽을 돌아보았어. 한 손에는 핸드폰,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말야.

.... 선택하라는 건가?
그런 것 같았어.
난 처음에 핸드폰 쪽을 가리켰는데, 그러다가 맥주 쪽을 가리켰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말야.
그리고 바텐더가 세 병째 맥주를 내 앞에 놓아주었지.
그렇게 둘이서....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각자, 일곱 병씩 마셨어.

한마디도 안 하고?
안하고, 가끔 병을 부딪치기는 했지만.

친구가 올 때까지 계속?
계속.

그럼 한 시간 동안 일곱 병을 마신 거야?
응. 
이상하게, 맥주 맛이 처음 그대로였어.
달콤하고 쌉쌀하고 독하고 부드럽고 아련해 지는 거야.
게다가 이상한 건, 어느 정도 취기는 오르는데 더 이상 취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는 거야.
아니다, 어쩌면 꽤 취했을지도 몰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 같아졌어.
나중에는 틀림없다고 확신했지.

이야기를 걸어보지 그랬어?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한두 마디를 했던 것 같아.
'기억해? 여기 왔던 날' 이라거나 '그때는 왜 그랬어?' 그런 이야기.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가끔 미소를 지었을 뿐.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어지러워져서, 화장실에 가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어.
돌아와보니 내 옆에 그 사람 대신 친구가 앉아 있었지.

그 사람은....?
그냥 가버린 것 같았어.
친구가 배고프다며, 뭐 좀 먹으러 가자고 재촉해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런데 계산을 하러 간 친구가 나를 부르는 거야......,

왜?
가보니까, 바텐더가, 계산은 이미 끝났다는 거야.
누가 했느냐고 물었더니 내 옆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이 했대.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주라고 했다면서, 나한테 뭘 건네주는데....,

뭐야? 전화번호?
지갑이었어.........,

뭐? 전철에서 잃어버렸던 네 지갑?
응. 
지갑을 열어보니까, 
처음 내가 마신 맥주 두 병값에 해당하는 돈만 없어지고, 다른 건 다 그대로 있었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 소매치기었어? 
아니지, 소매치기라면 왜 너를 따라갔겠어?
게다가 처음 두 병은 지갑에서 꺼낸 네 돈으로 계산을 해?
그리고 그 다음부터 마신 다섯 뼝 값은 또 자기가 내고?
바텐더가 말하길, 
내일 그 시간에 그곳에서 기다리겠다고, 그 사람이 전해달라고 했대.

그래서? 다음날 다시 갔어?
아니

왜?
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또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소매치기는 아닐 거야.
네가 떨어뜨린 지갑을 들고 너를 따라갔겠지. 내 생각은 그래. 
하지만 왜 다음날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지?
난 정말로 누구를 만나고 싶엇던 걸까.... 그걸 알 수 없어서.
내가 아는 그 사람? 
아니면 그날 처음 만난 사람?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그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을 닮은 누군가를 만나든, 
두 번 다시 그런 식으로 같이 앉아서 술을 마시지는 않을 거라는 거야.
뭔가...  하나의 시기를 통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심장이 빨리 뛰고, 어지러워지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일 같은 건,
지나간 사랑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느낌.... 
기억나니?  언젠가 축제를 끝내고 소나기가 내렸을 때,
우리 둘이 흠뻑 젖은 채 노래 부르며 한참 걸어다니던 일...., 

그래.... 어떻게 잊겠니
다시는 그런 날이 오지 않겠지.....?  (p123)
※ 이 글은 <초콜릿 우체국>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저자 - 초콜릿 우체국
저자 - 황경신
북하우스 - 2004. 06. 17.

[t-07.04.25.,  210426-1621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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