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반야암 오솔길 카페」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자유.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20세기 문학의 한 획을 그었던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적은 그의 묘비명이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 하나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그와 조르바를 만나게 된다. 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실존의 인물 조르바를 담은 책 속에는, 그의 묘비명에 의해 추측되는,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자유에 관한 정의가 여러 모습으로 언급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이성과 도덕, 윤리의 갑옷을 두른 채, 유토피아적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육체적인 쾌락을 속되게 여기고 그에 부합된 정신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나’는, 책 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는 자이기도 하다. `나’의 절친했던 친구는 그리스인 동포를 구하기 위해 전선으로 떠난다. 이별의 순간, `나’에게 책벌레라는 말을 충고처럼 남긴다. 그 말에 자극을 받은 `나’는 그동안 책벌레로 살아왔던 삶의 양식을 바꾸어, 행동하는 삶으로 뛰어들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의 카페에서 크레타섬으로 가기 위한 배를 기다리던 중, 범상치 않은 기운의 조르바와 만난다. 그리고 그와 함께 크레타섬에서 갈탄광 사업을 하게 된다. 함께 지내는 몇달 동안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그로 인해 서서히 변해가는 자신을 느낀다.
산투르라는 악기를 갖고 다니는 조르바는 산투르는 짐승이며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하고, 그걸 키는 자신은 인간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그 뜻 역시 자유라고 강조한다. 사물에서도 생명을 느끼는 그는 날마다 죽을 것처럼 살며, 날마다 새로 태어난 듯 세상을 경이로워한다. 배고플 때 육체에게 먹이는 것은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며 육체는 곧 영혼이라 말하는 그는 가슴으로 말하고 본능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가 거침없이 뱉어내는 말속에는 인간 본성의 통찰과 삶의 본질을 꿰뚫는 원시적 혜안이 진하게 묻어있다. 그가 독립군으로서 살인과 방화와 사기를 서슴지 않고 실행했을 때 그에 대한 결과가 `자유’라는, 부조리와 모순을 경멸하며 더이상은 조국이나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기로 한다. 자신의 주인은 자신이며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지극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지자이다.
조르바가 생각하는 신은 스펀지에 물을 묻혀 죄를 닦아주는 자비한 신이며 하찮은 미물의 죄를 일일이 따지지 않는 통이 큰 분이다. 다만 불쌍한 인간을 지나치는, 특히 여자를 포함한. 즉 연민이 없는 이는 벌로 다스리는 신이라고 말한다. 어릴 적 그에게 영향을 준 후세인 아가 성인의 말씀 중 `천당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다.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지 말라.’는 교훈은 그의 삶의 철학이 되었다. 독립군과 행상, 광부, 옹기장이, 등을 거치면서 그가 얻은 것은 종교나 이념을 떠나 모든 인간은 똑같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스스로 해탈해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콩을 먹으면 콩을 말하고, 뱀처럼 온몸을 땅에 붙이고 대지와 호흡하는 단순하고 육감적인 인간이다. 조르바의 앞가슴과 배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지만, 등에는 없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결코 등을 보이지 않았던 그의 생은, 육체와 영혼 그리고 신과 죽음까지도 온몸으로 껴안고 처절하게 문제와 부딪치며 살아온 삶이었다. `나’, 즉 저자는 ` 조르바의 말들은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난다. 그런 말들은 곧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갈탄광과 벌목 사업의 실패로 그 둘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배워 달라고 청한다. 조르바에게 춤은, 감정을 전달하는 또 다른 언어였다. 또, 그 행위를 통해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원초적 표출의 수단이기도 했다. 조르바와 `나’는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텅 비어진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해방감과 온전한 자유 그리고 희열의 벅찬 감정에 휩싸인다. 두사람은 춤을 함께 춤으로서 그 감정을 공유한다. 번데기가 나비로 부화하듯, 두꺼운 관념의 껍질을 깨고 새로이 변화된 자신을` 나’는 보게 된다.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본능대로, 행동하는 자유인 조르바. 그 역시 나름의 법과 질서, 그리고 신의 철학이 있었다. 조르바의 영향으로 서서히 변화하는 `나’, 즉 카잔차키스는 그가 꿈꾸어 왔던 자유의 참모습을 그의 책 속에서 조르바라는 실존의 인물을 통하여 구현했다. 그가 자유의 개념을 마음속 깊이 각인하게 된 것은 유년 시절, 아버지로부터였다. 그의 또 다른 책 <영혼의 자서전>에서 보면, 그가 9살 때 아버지는 터키인들의 손에 교수형을 당한 기독교도들의 주검에 데리고 간다. 그 주검에 경의를 표하게 하고, 결코 이를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누가 이분들을 죽였냐고 그가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자유’라고 대답한다. 젊었던 한때 사제의 길을 걷고 싶어 했던 카잔차키스는 터키의 지배를 받던 조국의 자유를 비롯하여 영혼의 자유를 일생에 걸쳐 좇았다. 평생의 숙업이었던 그의 자유는, 인간의 본능과 집착,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정신적인 해탈이었다. 그가 미리 준비했던 묘비명의 글귀로 미루어 보아, 그가 찾고자 고뇌하고 갈망했던 자유는 결국 죽음이어야 이룰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덮으며 평소에 자주 사용하던 낱말이지만 정작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지 못하는 자유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 자유란 누구의 억압이나 강요가 아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일 것이다. 인간은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선택한 자의 몫이리라.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는 선악과도 함께 주어졌다는 성경 구절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글 - 민 정 희
출처 - 통도사 반야암 오솔길 (지안스님) http://cafe.daum.net/ze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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