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국회도서관 2022. 07~8월호」
내 삶에 들어온 책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언제나 먼저 겉을 보고 나중에 안을 살핀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물이 아닌 나 자신이라면 어떨까?
나를 살피기 위해 내 겉모습을 파악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안으로부터, 내면에서부터 탐구를 시작하는 게 옳다.
이 책에 관해 말하려면 초등학생 때 친구였던 K군과 함께한 추억을 꺼내야만 한다. 언제나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맞다. K와는 고등학생 때까지 가깝게 지냈지만, 그 이후로는 조금씩 멀어졌다. 멀어진 이유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그 믿음이 변하지 않았다. K의 마음은 어떨까? 물어도 답을 줄 것 같지 않다. 이 역시 누구의 탓도 아니다.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인 나와 달리 K는 강아지처럼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같은 동네에 살기도 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에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우리 둘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 나는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고, 반대로 K는 산만한 태도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섞이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우리는 서로에게 끌렸다
K의 쾌활함과 밝은 모습을 보면 늘 부러웠다. 나는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시절엔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종일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누가 말을 걸어도 눈은 다른 곳을 응시한 채로 “응”, “뭐, 그렇지” 정도로만 대답했다.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녀석이라 여겨서 거리를 뒀다.그런데 K만큼은 끈질기게 내게 호기심을 보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자기 혼자 이런저런 얘기를 중얼거리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들은 대부분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나는 그가 들려주는 신기한 얘기들을 좋아했다. 한참 얘기하다가 갑자기 뚝 끊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그래서, 어쨌는데?”라며 짧게 반응을 보였다. K는 무슨 얘기든 재미있게 말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것도 나는 내내 부러워했다.
성격이 완전 정반대인 우리 둘에게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학교 성적이 좋다는 거였다. 우리는 나란히 반에서 1,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나는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K의 성적을 앞지르지 못했다. 녀석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100점만 맞았고 실수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산만한 성격을 가진 녀석인데 시험시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집중했다.
나는 K가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해서 시험 기간에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K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거기서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K의 공부 방법은 너무도 단순했다. 교과서를 펼친 후,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는 거였다. 전 과목을 그렇게 암기했다. 놀라운 건 암기하는 방법인데, 역시 특별한 게 없었다. 책을 들고 눈으로 몇 번 읽으면 그만이었다. 교과서에 밑줄을 긋거나 공책에 쓰는 일도 일절 없이 그저 읽기만 했다. 그렇게만 하면 책을 외울 수 있다고 했다.
분명히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K가 읽고 있던 교과서를 빼앗아 시험 범위 중 아무 곳이나 선택해서 문제를 냈다. K는 내가 그 문제를 낼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즉시 답을 말했다. 다른 문제를 내도 결과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심지어 K는 자기가 읽은 부분 전부를 암송할 수 있었고, 특정 단어를 물어보면 몇 쪽의 몇 번째 줄에 나오는지 까지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도 큰 단점이 있었다.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그런 집중력과 암기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거다. K는 교과서 외우기는 물론 하루에 한 개씩 정해 놓은 365일 꽃 이름과 꽃말을 쉽게 외웠고 교회에선 성경 본문을 줄줄 외워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 이름이나 같은 반 친구 이름은 전혀 몰랐다. 심지어 자주 같이 놀면서 몇 번이나 가르쳐 준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해 가운데 글자만 뽑아 ‘성아’라고 불렀다.부러움과 놀라움, 그리고 뭔지 모를 불안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K와 중학생 때까지 그럭저럭 재미있게 지냈다. 하지만 그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나도 녀석처럼 아는 게 많으면 좋을 텐데. 할 수만 있다면 K에게 주어진 그 천부적인 재능을 빼앗고 싶다는 나쁜 상상도 했다.
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시간은 말없이 흘렀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K는 내게 놀라운 고백을 했다. K는 자기가 읽은 것을 모두 암기해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을 예정이라는 거였다. 그는 모른다는 것, 모를 수도 있다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이 세상 모든 걸 다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법이다. K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정신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산만했던 녀석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서 거의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의 암기력에 감탄하며 집에서 둘이 암기 게임을 하자고 그랬던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K의 정신을 더 황폐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 이후 오랫동안 무어라도 그를 도울 게 없는지 살피고 다녔다.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는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 헌책방에서 아주 특별한 책을 발견했다. 왜 이런 책은 늘 ‘우연히’ 만나게 되는 걸까?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서문에서 가상의 편집자가 하는 말을 빌려 그 원고를 낡은 책상 아래 숨겨진 비밀 공간에서 우연히 발견했다고 썼다. 내가 만난 책도 우연히 만났는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서문에도 역시 번역자가 우연히 서점에서 원서를 발견했다는 말이 나온다
우연히 발견해서 번역한 책을 내가 또 우연히 발견하다니.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것은 모든 걸 다 알고 싶다던 K라고 하더라도 상상조차 못 할 거다. 그 책 제목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다. 나는 제목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K가 떠올랐다. 이건 정말 그에게 필요한 책이다! 너무나도 들뜬 마음에, 나는 장 그르니에의 『섬』 원고를 들고 단숨에 집으로 뛰어간 카뮈처럼 그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나는 책을 K에게 주는 데 실패했다. 아니, 주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즈음 K는 이미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한없이 슬픈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그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런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K가 아닌 바로 내가 읽었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난 다음, 책을 번역한 정현종 시인이 그 책을 처음 발견해 읽었을 때의 일을 적은 산문을 보게 됐다.
시인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의 저자 크리슈나무르티가 보여주는 “사물에 대한 접근 방법이 아주 매혹적이었다”1) 라고 썼다. 그 방법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겉에서부터 보는 게 아니라 안에서 시작하자는 주장이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겉을 보고 나중에 안을 살핀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물이 아닌 나 자신이라면 어떨까? 나를 살피기 위해 내 겉모습을 파악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안으로부터, 내면에서부터 탐구를 시작하는 게 옳다.
나는 K와 친했으므로 그를 잘 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그저 이 사람의 겉만 보고 알았을 뿐이다. 그렇게 안 것으로 나는 그의 모든 걸 파악했다. 하지만 과감하게 K의 내면으로 뛰어들어가 보지 않았기에 앎은 그저 무늬에 불과했다. 나는 K가 겪었을 내면의 괴로움을 한 번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단지 그 재주에 경탄할 뿐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책에서 “당신이 무언가를 찾을 때 사실 당신은 다만 진열장을 구경하고 있을 따름이다”2) 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K와의 관계만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살아오면서 나는 늘 뭔가에 대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남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자 했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믿을 때 기분이 좋았다. 내가 아는 걸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있다는 믿음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이 위태로운 앎의 서커스를 즐기고 있던 것이었다. 진짜 앎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하루하루 배우며 살아간다. 배우기를 포기하고 사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그런 경우는 산다기보다는 그냥 생존해 있는 거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음 그 이상의 삶과 앎을 추구하기에 아름답다. 그러나 앎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무기가 될 때는 비참한 폭력이 나타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아는 것’이라는 올무를 벗어던진 참다운 자유를 찾으라고 말한다.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날마다 지금까지 알던 것과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어제까지 알던 것으로 오늘을 살면, 오늘은 새로운 날이 아닌 어제의 날이다. 오늘이 어제까지의 앎으로 뒤덮여 있으면 내일도 어제의 그림자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은 언제나 어제에 머무르며 어제의 앎에 대해서만 말하게 된다.
책방에서 일하며 작가로 활동하는 내게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엇보다 중요한 책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있지만 아는 것과 결별하라는 말을 해주는 책은 이것이 유일이다. 일하는 것이나 책을 쓰는 것 모두 아는 게 많아서 가능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다. 일을 잘하려면, 책을 쓰려면 어제까지 알던 것과 이별하고 오늘 내게 주어진 새로운 앎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아는 게 많은 이를 선생이나 전문가로 여기고 따른다. 그런 대접을 받고 싶은 목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혹은 알고 있다 믿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에는 별로 힘쓰지 않는다.이 책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만난 것을 계기로 나는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유의 본모습은 겉치레에 있지 않다. 내가 만난 자유는 바깥이 아닌 안에서부터 기쁨이 터져 나오는 벅찬 감정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안으로 들어온 이 작은 책 한 권이 그 의미를 가르쳐줬다.
1) 정현종, 『두터운 삶을 향하여』, 문학과지성사, 2015, p57
2)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현종 옮김, 물병자리, 2002, p13
윤성근 작가의 내 삶에 들어온 책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물병자리
글 - 윤성근작가. 『이상한 나라의 헌 책방』 저
출처 - 월간 국회도서관 2022. 07~8월호.
[t-22. 12.30. 20221228-1629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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