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 토지」
‘거역하는 남자 항복하는 여자, 그들의 순전한 사랑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양반 규수 서희와 그녀의 시중을 드는 길상, 두 사람의 사랑을 스케치합니다. 길상은 고백하고 서희는 청혼을 하는데, 그 풍경은 어찌된 일인지 영혼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듯합니다. 길상은 상전 서희에게 제 맘대로 대들 뿐만 아니라 제 맘껏 조롱하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에 응수하는 서희의 프러포즈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악동같이 마구 응석을 퍼붓는 것이 서희의 청혼입니다. 거칠기가 이를 데 없는데도 사랑스럽습니다.
서희는 가식을 떨 줄 모르는 상전이며, 길상은 아부를 떨 줄 모르는 하인입니다. 서희의 언행은 언제나 가식없이 곧고 바릅니다. 가식 없이도 능히 생존이 가능한 부유한 양반가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길상이 역시 거짓이 없습니다. 최참판댁 식솔이 되기 전에는 절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길상은 다른 사람을 기만할 줄 모릅니다. 서희는 상전이고 길상은 하인인데도, 두 사람은 똑같이 늠름하고 당당합니다. 강자적 면모를 갖춘 두 사람을 통해 미루어보건대 혈통, 터전, 재력, 종교 등에 스며 있는 문화적 분위기가 사람의 품성 형성에 영향을 끼칠 것도 같다는 추측을 막연하게 해봅니다.
길상의 눈에 비친 서희는 보석같이 빛나고 연꽃같이 아름답습니다. 서희의 언행이 가차 없이 투명하기 때문일 듯합니다. 서희의 솔직함이 하도 맹렬해서 어떨 때는 어찌 저럴 수가 있나, 하고 포악하게 여겨질 적이라도 이상하게 순수하고 영롱하게 와닿습니다. 서희의 그런 솔직담백함은 길상으로하여금 상전을 신뢰하는 토대이자 연정을 품게 하는 매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서희 또한 아첨이 무엇인지도 아예 모르는 천진한 길상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입니다. 길상은 서희의 심기가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눈치를 살피느라, 해야 할 말을 삼키지는 않습니다. 상전의 품위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적절한 때를 가려 냉철한 어조로 사실 그대로를 전합니다. 길상이 아부에 능하지 않으니 오히려 총명한 서희는 신망을 더 키워갔을 수도 있습니다.
소년 홍이에게 스물여섯 살 길상은 참새에게조차도 신뢰를 얻고자 애를 쓰던 아저씨였습니다. 홍이는 용이와 임이네 아들이면서도, 월선이를 친엄마보다 더 잘 따랐던 아이입니다. 홍이는 길상이가 참새가족들 먹으라고 수수알갱이를 마당에다가 흩뿌려 놓고서 지켜보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젠가 말이요? 작년인가 아버지 심부름을 갔는데 길상이아제가 들창문에 문구멍을 뚫어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소.
나를 번쩍 안아서 들창문 문구멍에 눈을 갖다대 주는 거 아니겄소? 참새들이 모여서 수수알갱이를 묵고 있는데 모두 새끼들을 데리고 안 있겄소? 어미 참새도 여러 마리고 새끼 참새는 더 많아요. 참 신기롭더마요.
길상이아제가 수수알갱이를 준 거라요. 그런데 길상이아제는 참새와 도무지 친해지지 않는다며 슬픈 얼굴을 하드라 말 입니다.”
“홍아! 참새란 놈이 저리 사람을 안 믿으까? 문을 열고 내다보믄 다 달아나거든. 지금도 쫑긋쫑긋 사방에다 정신 파느라 고, 어미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말이다. 벌써 여러 날짼데 도무지 나하고는 친하려 하지 않거든.”
그렇게 연민을 여전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길상이지만 그는 현재의 자신이 진짜 자신이 맞는가, 자문하게 됩니다. 절에서 자라서 줄곧 봉건적인 사회에 젖어 살던 소년 길상이 하동땅 최참판댁을 거쳐, 이제 간도땅 용정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달라져도 꽤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길상은 간도땅에서 자본 축적의 욕망을 가진 서희의 투기 혹은 투자를 이롭게 하는 행동 요원이어야 했으니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길상은 번성했던 용정 도시에 대화재가 휩쓸고 간 뒤 잿더미로 폭삭 변한 모습을 보고서 자신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엄청 변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그만 슬퍼지고 맙니다.
‘절을 둘러싼 산봉우리 밖에는 세상이 없는 줄 생각했었지......’ 그렇게 믿었던 어린 상좌는 좀 더 커서 윤씨부인 가마를 따라 섬진강 강물을 따라서 가느다란 운명의, 세월의 줄을 타고 이곳까지 오지 않았는가. 이곳 언덕에 와서 우뚝 서 있는 한 육신이 과연 자기 자신일까. 길상은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 인간의 육신이 흐느껴지도록 슬프다.
길상은 폐허로 변해 버린 도시의 거리를 바라보다가 세월 따라 터전따라 변화되어 온 자신을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길상은 변화한 자신이 왜 자랑스럽지 않고 서글펐을까요? 이질적인 간도땅과 근대 자본주의 시류에 아등바등 적응하며 살아내고 있으니 뿌듯해야 할 터인데 말입니다.
길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러 인연 따라 또 주어지는 시공간에 따라 부지런히 관계하느라 변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변화되어야만 살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길상은 혹시 한결같이 변함없이 살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과거 어릴 적의 자신과 달라진 현재의 모습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요?
길상은 내일이면 재로 변한 저 죽은 도시를 살리기 위해 새집을 지을 목재를 사러 회령에 가야 합니다. 새로운 필요와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길상은 황폐한 도시는 살리는 데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죽은 도시는 차츰 살아날 것을 길상은 압니다. 도시가 현재 저렇게 죽어 있는 것은, 과거에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더불어 알아차립니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다시 그 결과가 원인이 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숱한 인연들을 받아들이고 관계 맺으며 변화는 끊임없이 이어져 갈 것을 인식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리라는 것도 길상은 미루어 짐작합니다. 그리하여 길상의 사유는 ‘죽지 않는 인간’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길상이 발길을 옮겨놓는다. 구릉진 곳을 휘청휘청 올라간다. 길상은 바위에 등을 대고 가물거리는 별들을 오랫동안 올려다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별들은 저렇게 가물거리고 있었더란 말인가. 용정 도시의 거리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무너지고 재가 되고 폐허로 변한 곳, 저 잿더미는 죽음일까? 저 사물의 변화는 과연 죽음일까? 끝이 없는 세월과 가이없는 하늘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끝이 없고 가이 없는 것이라면 없을 것이다. 근원의 생명도 항구불멸이라면 근원의 생명이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다.’
길상은 ‘우주 모든 것은 살았기 때문에 죽고, 죽었기 때문에 살아나는, 그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게 되므로,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에 공감합니다. 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따라 변해가니 ‘나’라는 것도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므로 ‘나’를 ‘나’라고 규정지을 ‘나’의 실체는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도 공감합니다.
우관스님은 인과에 어둡지 않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의 흐름을 이용하고자, 길상의 주변에 더 나은 인연을 선사하고자 길상을 최참판댁으로 내려보냈을지도 모릅니다. 터전을 변화시키는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길상에게 더 나은 인연들을 파생시켜 나갈 것을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최참판댁 식솔이 된 길상의 머릿속에 우관스님은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관스님의 실체를 없다고 할 수 있을지는 불교에 무지한 저에게 의문입니다. 우관스님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과 우관스님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 다를 듯하니 말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차이가 있어서, 진정한 ‘나’의 실체란 것이 없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구별되어지는 오로지‘나’만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무상과 무아의 경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길상이 무상과 무아를 읊조릴 때 덧없는 허무감에 사로잡혔는지 아니면 홀가분한 자유와 새로운 희망을 느꼈는지 헷갈립니다.
섬진강을 따라 굽이쳐 뻗은 삼십리, 하동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그 위로 세월이 발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윤씨부인의 모습이 지나간다. 우관스님이 지나간다. 문의원, 최치수, 김서방, 봉순네, 김평산, 귀녀, 강포수, 돌이, 수동이, 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 곰보 목수의 우렁우렁한 목청이 산을 울리고 사라진다.
‘그들은 과연 죽은 사람일까?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어찌 이 육신을 살았다 할 수 있으며 떠나간 사람들을 죽었다 할 수 있단 말인가. ’
길상은 자신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기까지 수많은 인연들과 관계 맺어진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인연들이 계속해서 다가올 것이고 그 얽힌 관계들이 자신을 변화시킬 것을 여실히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내일이면 옥이네와의 인연이 회령 가는 길 위에 기다리고 있는 줄은 까마득히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무수한 인연들이 길상이 곁에 다가왔다가 또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길상은 끊임없이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내일 회령가는 길목에서 다가올 인연은 길상의 신분을 전환시키는 기회가 되어 줄 것입니다.
현재 길상의 신분과 혈통은 오리무중입니다. 길상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절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핏줄의 근본을 알 수 없는 길상의 성씨는 김가입니다. 그러니 길상은 김길상입니다. 윤씨부인을 겁탈했던 동학당 우두머리 김개주의 아들 김환, 즉 구천이도 절에서 자랐습니다. 길상이와 구천이는 우관스님이 있는 같은 절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김개주의 친형이었던 우관스님이 윤씨부인께 청하여 길상은 절에서 내려와 최참판댁 식솔이 되었습니다. 우관스님이 윤씨부인께 길상이 글공부를 하도록 배려해주십사 하는 부탁을 각별히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길상은 예사로운 아이는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김개주는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의 감정 때문에 서희 할머니 윤씨부인을 겁탈했습니다. 김개주의 아들 김환, 즉 구천이는 서희 엄마 별당 아씨를 사랑하여 함께 도주를 꾀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은 이럴 경우 쓸 법합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같은 혈통을 가진 우관스님이니, 길상이 혹시 우관선사의 핏줄은 아닐까, 하고 상상을 비약시켜 봅니다. 길상을 향한 우관스님의 정이 남달랐으니 말입니다. 길상은 최참판댁에 살던 시절, 우관스님의 슬픈 눈빛을 떠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길상은 빨갛게 핀 석류꽃을 올려다본다. 다시 눈길을 돌려 둥둥 떠내려가는 구름을 본다. 우관스님은 무서운 분이었지만 다른 상좌 애들보다 길상에게 눈길을 많이 보냈다. 눈길이 슬프게 보인 것을 길상은 기억한다. 이노움! 할 때는 굵은 눈썹이 꿈틀꿈틀 움직였지만 석장을 짚고 산봉우리 중턱을 안개같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모습 -.
‘우째 그리 서러워 보였을꼬? ‘노스님은 와 나를 여기 보내셨을꼬? ’
살아생전 서희 할머니 윤씨부인은 서희의 혼처로 이부사댁 이상현을 내심 바랐습니다. 상현은 이동진의 두 아들 중에 맏이입니다. 이동진은 윤씨부인의 아들 최치수와 동문수학했던 친구로서, 양반이면서도 상민층을 동정하고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노비문서를 불태워서 종들을 내어보내고 자신은 국경을 넘어 북쪽땅으로 가서, 조선이 재건되기를 바라며 헌신했습니다. 윤씨부인은 가장이 집을 비운 이부사댁 집안 살림을 돕고자 갖가지 곡식을 달구지에 실어서 보내곤 했습니다.
곡식을 싣고 간 날, 길상은 감나무 밑에서 콩국수를 먹습니다. 국수를 반쯤 먹었을 때 나무가 흔들리면서 감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흙먼지도 함께 국수 위에 내려앉습니다. 열 살쯤 된 상현도령이 나무 위에서 장난을 쳤던 것입니다. 길상은 그런 상현이 싫습니다. 상현이 나무에서 내려와 감이 수북이 떨어져 있는 국수를 마저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길상에게는 뼛속까지 하인 신분이 각인되어 있지는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장차 하인 신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을까요? 길상은 몹시 난감하고도 비통한 심정이 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상현도령과 맞섭니다.
상현은 나무를 타고 쪼르르 내려왔다.
“왜 안 먹는 거냐!”
길상이 반밖에 안 될 성싶은 조그마한 상현이는 어른처럼 호령을 했다. 길상은 잠자코 그를 바라본다.
얇삭한 입술, 오똑하니 날이 선 코, 미소년이다. 성깔과 자부심이 몸 전체에서 배어나온다.
“고만 먹겠습니다.” 길상의 말씨는 정중하나 단호했다.
“네 상전이 먹으라면 어쩌겠느냐? 대답을 해!”
“먹을 것입니다.”
“그럼 먹어. 내가 먹으라 했다.”
“도련님은 소인 상전이 아니옵니다.”
“뭐라구?”
상현은 한발로 땅을 굴렀다. 그러나 억쇠가 오는 것을 보고 킬킬 웃으며 달려가 버린다.
돌아오는 길에 돌이는 아무래도 마님께서 그 댁 상현도령한테 욕심을 내시는 모양이라 했다.
“하지마는 정혼을 했이니께 할 수 없기는 하지만, 욕심 내실 만도 하지.
똑똑하고 벌써 기상이 보통 아니라니.”
길상은 왠지 모르게 괴로웠다. 심장을 바늘 끝이 찌르는 듯 쓰라리고 서러운 생각이 치밀었다.
오는 동안 내내 길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윤씨부인의 속내를 복이를 통해 들은 길상은 왜 마음이 아렸을까요? 사춘기 길상의 마음 깊숙이에는 이미 서희가 연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가 봅니다. 훗날 열네 살 서희를 향한 스물두 살 길상의 연정을 열여섯 살 봉순이가 눈치챕니다. 그래서 봉순이는 서희 길상과 함께 간도땅에 가지 않습니다. 봉순이의 간도행 불참은 길상의 의중을 확실하게 짚어보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봉순이는 길상이가 자신과 혼인하고서도 서희의 시중을 드는 하인 신분으로 줄곧 살아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섬진강 강가 어둠 속에서 길상에게 에둘러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 봅니다. 발각되지 않아야 할 간도행 절차에 대해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났을 적에 말입니다. 봉순이는 길상에게 언제까지 총각 신세로 살 것인지 다그쳐 묻습니다. 하지만 길상의 심중에 오로지 서희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모랫바닥에 주저앉고 맙니다. 터져나오는 울음도 악다물어야 했습니다. 봉순이를 간도행에 동참시키고 싶어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길상이가 거짓말까지 합니다. 간도땅에 가서 혼인을 하자는 약속을 하지만 봉순이는 현혹되지 않습니다. 길상이를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우정의 배려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견디기 힘든 질투와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현명한 결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봉순이는 길상의 마음을 다시 한번 떠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 진짜로 소리공부해서 기생 될까보다. 간도에 가면 별수 있을라꼬?
나 같은 것. 그나저나 거기는 언제꺼정 머리꼬릴 늘이고 있을 참인가?
스물둘, 아니 스물셋, 나이도 적잖은데 남보기가 안 부끄러운가 모르겄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으면서 빈정거리는 말투다.
“나... 나는. 애기씨만 아니라믄 중 될 몸이제.” 봉순이는 모랫바닥에 퍼질러 앉는다.
“애기씨만 아니라믄... 애기씨만 아니라믄 중이 될 몸이라고... 애기씨는 왜?”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다.
“그거는 은혜 때문이다.. 돌아가신 마님께서... 날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고, 글도 배우게 하시고...”
“장가를 들믄 애기씨를 저버리는 게 된다 그 말가? 거짓말 마라! 와 맘을 속이노!”
오랫동안 어둠을 바라보고 있던 봉순이 픽 웃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머리를 돌렸는데 길상은 오히려 아픔을 느낀다.
“이제 그런 말 때리치우는 기이 좋겄고. 도리어 후련해졌는지도 몰라.
조금이라도 희망을 갖는 것보담은 편할 것 같구만.
만일의 경우 내가 못가게 되더라도 떠나야 할 기다.”
길상은 함께 간도로 가지 않겠다는 봉순의 저의를 안다.
“봉순아. 우리 간도에 가믄. 혼인하자. 내 맹세하라믄 하, 하지.”
그러나 봉순이는 뛰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 봉순이는 길상을 만나지 않았다.
봉순이는 결국 간도행 배를 타야 하는 부산에 당도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했으나 길상은 충격을 받는다. 마음속으로 봉순이를 불러본다.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낯선 거리에는 찝찔한 바닷바람이 분다.
간도행에서 옆길로 빠진 봉순이는 서희와 길상으로부터 벗어나 자립해서 훗날 기화라는 이름의 기생이 됩니다. 그리하여 이부사댁 상현의 딸, 양현을 낳습니다. 상현은 이미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으니 상현과 봉순의 딸 양현의 성장기는 떳떳하지 못했을 듯합니다. 봉순이 간도행에서 빠질 때 상현이 간도행에 동참했습니다. 처자식을 남겨두고서 아버지 이동진의 안부를 핑계삼아 말입니다. 조선땅이 아니니 어쩌면 서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속셈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간도땅에는 서희를 지키는 파수꾼 길상이 있습니다. 길상은 상현과 서희의 혼인을 결단코 막으려 합니다. 그 이유가 애기씨 서희를 상현에게 뺏길 수 없다는 연정 때문인지, 아니면 하인된 도리로서 상전을 첩으로 만들 수 없다는 보필 차원인지는 헷갈립니다. 한편 상현 역시 양반 규수인 서희가 양반이 아닌 길상과 혼인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양반 중시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각자 강경한 주장을 고수하는 두 사람은 팽팽한 대결을 펼칩니다. 설전의 포문은 길상이보다 대여섯 살 어린 상현이 먼저 엽니다.
“자네는 그 나이에 장가도 안 들고 어쩔 셈인가. 달리 생각이 있어서 그런가?”
“장가갈 때가 되면 가겠지요. 제 일신상의 문제는 근심 마십시오.
나이 이쯤 됐으면 조만간에 제 자신이 처리하게 되겠지요.”
듣기에 따라서 어린 주제에, 하는 경멸의 뜻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현은
“그야 그렇지, 자네 일에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
허나, 서희에 관한 일이라면 사정이 다르지 않겠느냐? 자네한테는 상전이요,
나는...... 그렇지.
비록 핏줄은 닿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가의 내력을 봐서는 오누이같은 처지라 하여도 허튼 말은 아닌 성 싶은데? 해서 하는 얘기야.
서희는 혼인을 해야 할 게야. 뉘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자네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자네가 장가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지?”
고삐를 늦추지 않고 육박해온다. 벌겋던 길상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셔진다.
상현은 그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상현의 빛을 발하는 눈을 받는 길상은 한순간 휘청거리는 것 같았으나 웃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제 일신상의 일에는 관여하지 말아주십시오.”
“일신상의 문제가 아니야. 너의 마음속의 문제다.”
“저의 오장육부를 끄내 보여라 그 말씀이시오?” 얼굴에 노기가 떠오른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게야. 자네가 똑똑한 것도 알고 잘생긴 것도 안다.
이곳은 내 땅이 아니지만 우린 조선 사람이야.
아무리 세상이 뒤죽박죽 반상의 구별이 없어졌기로 하루아침에 근본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야.
내 땅이 아니라고 해서, 양반들이 김훈장 꼴이 되고 양가의 규슈가 장사꾼으로 떨어졌다 해서
그것을 빌미로 삼는다면 내 칼이 자네 목에 들어갈 줄 알란 그 말이니라.”
“저도 한말씀 드리지요. 못 오를 나무 쳐다보지도 마십시오.
물론 이곳은 내 땅이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조선 사람들입니다.
나라가 망하니 삼강오륜도 땅에 떨어졌다고들 하더군요.
그러나 양반의 체통만은 엄연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내 땅이 아니라고 해서, 천애고아라 해서 뼈대 있는 집안의 규수를, 야심의 노리개로 삼을 시,
저의 칼도 그냥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 골수까지 종놈으로 썩어버린 놈이니까요. 그걸 충성심이라고들 하지요.”
상처받은 짐승같이 영악한가 하면 체념한 듯한 그런 눈이 상현을 쳐다본다.
“이놈! 종놈의 신분으로 뉘한테 그따위 혓바닥을!”
“서방님, 구차스럽소이다.
신분을 불러내지 않을 수 없는 그 정도로 허약한 분인줄 미처 몰랐소이다.
그렇다면 저도 나이가 많은 연장자라는 구원병을 청하리까? 먼저 가보겠습니다.”
길상은 일어섰다. 상현도 일어서는데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떤다. 길상은 돌아보지도 않고 나간다.
상현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주먹으로 탁자를 친다.
‘망할 자식! 길상이 이놈! 뭐,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 말라고? 내가 왜 못 올라. 오늘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오른다!
나쁜 놈의 자식,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서희하고 여기서 고향 땅 안 밟으면 될 거 아니야?’
상현에게 경고를 했던 그날 밤 길상은 꿈을 꿉니다. 상현에게 했던 경고가 서희를 보필하는 하인 신분으로서의 정당한 발언이었는지, 아니면 연애 경쟁자에게 던진 시비였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신분의 벽 때문에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서희를 간절히 욕망하는 듯한 꿈을 꾸게 됩니다. 불타고 있는 도시 속에서 서희를 애타게 찾고 있는데 정작 서희를 구출하여 등에 업고서 유유히 사라지는 상현을 꿈에서 보게 됩니다.
도시 거리에 즐비한 집들이 마구 무너지는 게 아닌가.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길상은
‘애기씨! 애기씨! 서희 애기씨!’ 하며 외치고 있었다. '나 여기 있어! 길상아! 나 여기 있단 말이야!’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이 뵈지 않는다. 길상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어디 계시오! 애기씨! 애기씨!’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나 여기 있다는 목소리만 애처롭게 들려온다. 길상은 미친 듯 무너지고 치솟는 불더미 속을 달려 들어갔다. ‘길상이 이놈!’ 벽력같은 소리에 돌아보니 이상현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고 서 있다.
‘애기씨가 불 속에 갇혔소!’
‘이노옴! 네가 무슨 상관이냐! 종놈 주제에.’
‘제가 어째 종놈이오? 나는 절에서 그 댁엘 갔을 뿐이오!’ 별안간 상현은 껄껄 웃어젖힌다.
‘종놈이 아니라면 중놈이라 하지. 이 중놈아! 네가 어찌 서희를 찾느냐?’
‘무슨 말씀이오?’
‘서희는 죽든 살든 내 사람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러느냐?’
‘뭐라구요? 그러면 소실로 삼겠다 그 말씀이오!
최참판댁 애기씨를 말입니다. 말이라고 하시는 게요? 안 되오! 안 되오!’
‘발버둥치기 아니라 벅수를 넘어도 허사는 허사야.
이미 나는 서희를 이렇게 등에 업고 있다.
똑똑히 봤느냐? 그러면 우리는 가네. 잘 있어 길상이, 이 중놈아!’
돌아서는데 처음에는 벼랑이었다. 그런데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 꽃버선을 신은 네댓 살 먹은 계집아이가 아닌가.
‘앗!’ 계집아이는 서희였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애기씨를 두고 가시오! 애기씨!’
등에 업혀가는 서희의 분홍치마가 꽃잎처럼 나풀거린다.
꿈에서 깨어나니 조금씩 밤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내가 어찌 종놈이냐구? 절에서 그 댁엘 갔을 뿐이라구 꿈속에서 그런 말을 내가 했겠다.
평소에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길상은 웃는다.
‘할 수 없는 종놈이로구나. 뼛속까지 썩어버린 종놈, 그 따위로 비천하게 변명을 했다는 것부터가.’
아침 안개가 사방에서 밀려온다.
‘하기사 상현 서방님이 장가든 몸만 아니었더라면 어지간히 짝이 맞는 부부,
애기씨하고는 천생연분이 됐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꿈과 현실은 반대’라는 속설을 믿는다면 꿈속에서 서희의 사라짐은 오히려 서희의 다가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감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길상은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을 끄려고 진화 작업에 착수합니다. 길상은 서희에 대한 마음을 단단히 접고서, 접은 그 마음에 쐐기를 박아 굳히려는 심정이 되어 상현의 아버지 이동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서희의 혼인을 먼저 치른 후에 길상이 자신도 혼인을 하겠으니 서희 혼처를 알아봐 주십사하고 말입니다. 그런 후에 길상은 과부 장가 소문을 묵인하거나 혹은 자처하고 다닙니다.
그에 반해 서희는 길상과 혼인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양반가 상현의 첩이 될 것인지, 하인 신분 길상의 본처가 될 것인지 깊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립니다. 상현과는 남매지간, 길상과는 부부지간이 되기로 말입니다. 상현과 오누이 결의를 맺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서희는 상현에게 길상과 혼인을 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하게 표명합니다. 서희는 마음이 정해지자 실행에 거침이 없습니다. 길상과의 혼인 성사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길상은 서희와의 혼인으로부터 달아나고, 서희는 길상과 혼인을 하기 위해 쫓아가는 모양새가 됩니다. 두 사람이 모두 고아이다보니 혼례를 치르려면 그들을 엮어줄 어른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의 혼인을 주선해 줄 적임자는 이동진과 김훈장일 수 있습니다. 이동진은 서희 아버지 최치수의 절친한 친구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느라 간도땅 가까이에 있었고, 김훈장은 서희가 어릴 적에 글을 배운 선생님이었으니 말입니다.
상민층을 동정하고 이해하는 이동진이기는 하지만 상현의 아버지이기도 하니, 길상과 서희의 혼인을 진심으로 지지해 줄지는 의문입니다. 이동진은 아들 상현의 면전에서 길상과 서희의 혼인을 변호하고 두둔합니다. 아들 상현이 몹시 아파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어쩌면 아들의 마음을 잡게 하고, 바르게 세우는 방편으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아들을 아낄 수밖에 없는 아비된 심정으로 말입니다.
고국을 떠나 열두 해를 보낸 이동진의 모습에는 황혼이 깃들었다. 삼십 대 좋은 시절을 만주 벌판의 모래먼지와 눈바람에 흩날려 버리고 오십 고개에 다 다른 마흔아홉 나이보다 늙었다. 용정서 며칠 머물 예정으로 달리는 마차에 흔들리고 있다. 이동진은 지난 여름 대면했던 아들 이상현이 분노에 불타며 했던 말을 되새겨본다.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그 어미에 그딸, 사람이 그렇게도 치사스러울 수 있겠습니다.
후안무치로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명색이 사대부집 규수가 하인놈하고 혼인이라뇨?
그것도 처녀의 몸으로 그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까?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서희아버님과의 우의를 생각하시면 외면하실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이번 일은 기필코 막으셔야 합니다. 정녕코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길상과 서희와의 혼인을 빠개버릴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 어떤 비열한 수단도 서슴없이,
죄책감없이 감행할 상현의 정신 상태였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너는 한 나라의 공주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자청했던 고사 생각은 못하느냐?
치사스럽기는커녕 서희는 총명하게 판단하고 결정한 거 아니겠느냐?
서희는 윤씨부인 그 어른의 손녀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구먼.
서희는 비록 계집아이지만 사내보다 담력이 있어. 눈도 매눈이야.
아마 연해주 간도 바닥을 다 찾아도 길상이만한 신랑감은 없을 걸? 뿐이겠느냐?
하동 땅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만한 배필을 구하긴 힘들 게야.
길상이는 서희한테 아주 썩 걸맞는 짝이니라.”
이동진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아들 심장에 꽂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피는 흘릴 만큼 흘려야 종기는 치유되는 법이다. 패배감과 증오심에서 이글이글 타는 눈이 마치 원수를 보듯 아버지를 쏘아본다. 갑자기 상현은 목을 꺾어버리듯 고개를 숙인다.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는 것이다.
비로소 상현은 자기 마음속에 난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절감한다. 서희 마음 한구석에 자기를 향한 한줄기 사모의 정은 있으려니 하던 희망까지 완전히 난도질당한 것을 깨닫는다.
“과연 길상은 자기 적수인가.
그 알량스런 가문 하나 뽑아버린다면 길상은 이, 나 상현을 훨씬 능가하는 인물이 아니냐.”
이동진은 아들 상현 앞에서는 길상과 서희의 혼인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서희 혼사에 관여하기 위해 용정에 도착한 이동진은 정작 길상의 편이 되어 주지 않습니다. 서희의 신랑감으로 길상이만한 적임자는 없다고 단언했던 이동진이 길상을 도외시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상민층에 우호적인 이동진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양반 혈통의 보유자였으니, 하인 신분과 다름없는 길상과 양반 규수 서희와의 혼인이 꺼림칙했을 수 있습니다. 이동진은 최참판댁 사랑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한아름 안고 오던 소년 길상이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까탈스러운 최치수의 성미를 맞추느라 예,예 하며 시중을 들던 하인 길상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서희와의 혼인을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을까요? 아니면 서희를 사모하는 아들 상현을 떠올리니 길상과의 혼인을 훼방 놓고 싶은 심사가 되어버렸던 걸까요?
이동진은 김훈장이 길상과 서희의 혼인을 극구 반대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버젓이 길상과 함께 김훈장을 찾아갑니다. 양반 혈통을 중시하는 김훈장의 목소리를 길상에게 직접 들려주고자 하는 심통으로 말입니다. 이동진은 자신의 견해를 김훈장이 강한 어조로 대신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동진의 속셈에서 간교한 정치꾼적 발상이 읽힙니다. 이동진은 오랫동안 독립운동 일선에 몸담아 오면서 음흉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정치 바닥 풍토에 어느새 젖어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동진이 김훈장에게 먼저 서희가 표명한 혼인 의사를 차분하며 전달하는 것으로 폭력의 기운은 감돌기 시작합니다. 이동진은 예를 갖춘 세련된 능청스러움으로 바로 곁에 앉은 길상을 향해 폭력의 포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지난 여름 상현이가 와서 소생한테 한 얘기가 있었소이다.
길상이는 모르는 일이겠습니다만 서희가 길상이하고 혼인할 것을 원한다는 얘기였었소.”
“저런 해괴망칙한!”
김훈장이 소리지르는 것과 동시 길상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진다.
길상이 동석한 것을 깨달은 김훈장은 허둥지둥 담뱃대를 찾는다. 연기를 뿜어내면서 눈을 감는다.
“양편에 다 부모가 없는 만큼 훈장 어른께선 길상의 아버님이 되신 셈치시고,
소생은 서희 아비된 셈쳐서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옳을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안 되는 얘깁니다!”
총알같이 길상의 음성이 날아 들어왔다. 그의 손등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언제 그리했는지 손등을 물어뜯은 것이다.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방안, 김훈장 이동진 어느 편도 길상의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저는 이미 언약을 한 여자가 있습니다. 애기씨도 알고 계시지요.”
이상한 일이었다. 이동진의 어깨가 축쳐진다. 실망이기보다 안도의 분위기다.
김훈장은 부지런히 담배를 피워댄다.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요. 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하지 말았어야 할 김훈장의 말이다. 길상의 턱밑에 심한 경련이 인다.
문틈 사이로 찬 겨울바람이 스며드는데 길상의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난다.
간도땅으로 이주해 온 평사리 사람들에게 김훈장의 존재는 미미해져 갔습니다. 다들 낯선 땅에서 척박한 삶에 적응하느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로지 길상이만이 김훈장의 거처를 걱정하고, 힘들게 마련해서, 보따리를 들고 직접 이사를 도왔습니다. 간도땅에서 김훈장의 의식주를 해결해 준 은인이 길상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도 김훈장은 호의를 베푼 길상을 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반절대주의자 김훈장에게 길상의 인간됨됨이는 혈통에 선행되어 고려될 가치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파렴치한 조준구를 양반이기에 믿고싶어 했던 김훈장이었으니, 그의 혈통주의는 요지부동이었던 것입니다. 길상의 은혜를 아무리 크게 입었다 한들, 길상이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다 한들, 길상이 양반이 아닌 이상, 서희와의 혼인은 김훈장으로서는 절대 용납 불가한 일입니다. 그런 김훈장의 목소리를 길상이 직접 듣도록 이동진이 분위기를 조성했으니 정치꾼의 비정함이 느껴집니다. 상현 아버지 이동진은 길상과 서희의 혼인을 방해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무의식까지 통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길상은 이동진과 김훈장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희로부터의 탈주를 모색하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두 어른은 길상과 서희의 혼인을 절대 불가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시켰던 것입니다. 김훈장과 이동진,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배척당한 느낌이 들었을 길상은 그날 밤 변두리 술집을 찾아 만신창이가 되어 홀로 밤새도록 술을 마십니다. 넓은 세상 한가운데서 외따로 동떨어진 길상은 그 절절한 적막감을 부여안고서 얼마나 가슴이 아렸을까요? 혼술하는 길상은 뱀이 되어 뱀과 대화를 나눕니다.
길상은 똬리를 틀고 대가리만 치켜든 뱀의 형상을 하고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뱀아 뱀아.
모든 인간한테 저주를 받은 뱀아. 나도 슬픈 뱀이고 너도 슬픈 뱀이다.
난들 뱀이 되고 싶어 되었겠나. 넌들 뱀이 되고 싶어 되었겠나.
왜 뱀이 싫은가. 뱀이기 때문이다.
왜 싫은가. 상놈이기 때문이다. 어느 뼈다귀의 자손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길상은 김훈장의 배척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매정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동진의 이중적 면모도 감당하기 벅찼을 것입니다. 비정한 양반들에게서 할킨 상처에 쓰라려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두 눈은 핏빛이 되었습니다. 빨간 토끼눈을 하고서 길상은 새벽녘에 월선옥을 찾습니다. 월선이 끓여주는 해장국으로 속도 달래고 마음도 달래야, 또다시 오늘 주어지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맞아주는 월선에게 길상은 웃으면서도 세상 인심이 무섭다는 말로 본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무당딸인 이유로 살아오면서 숱하게 핍박받았을 월선에게서 길상은 동병상련을 느꼈는가 봅니다. 신분의 벽이 철통벽인 것을 잊고서 감히 김훈장을 인간적으로 존대하고 이동진을 흠숭했던 자신이, 정작 위로받을 데는 월선이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음식이란 본래 허기진 배도 채우지만 상처입은 영혼도 어루만져 주기 마련입니다. 길상은 월선이 끓여준 구수한 해장국을 먹으면서 비정한 사람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밤새 술마시며 혹사했던 자신을 보듬어주고 쓰다듬어주려면 우선 바뀔 수 없는 현실부터 인정하고 순순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옳지, 수없이 겪었을, 그 무서움이 새겨진 월선아지매 얼굴이 보고 싶어 왔을 게야’
길상은 뜨거운 국물을 마신다. 속이 따갑다. 쓰라린다. 한데 어떤 쾌감이 있다.
아픔에서 오는 쾌감이다. 더 아파라, 더! 용솟음 치고 싶어진다.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하고... 사람의 짝도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훈장 어른 말씀이 옳습니다.
옳다마다요.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 있을 수 없지요...
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네에.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옳은 말씀이오. 옳다마다오.’
함성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꾸럭꾸럭 소리를 내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서운 심연을 본 어제 충격이 가슴 바닥에서 아직 울렁거리고 있다. 두 어깨가 축 처지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던 이동진의 얼굴이 크게 커다랗게 눈앞에서 확대되어 간다. 가슴 바닥에서 울렁거리고 있는 것은 실상 충격이기보다 두려움이다. 오싹오싹해지는 공포감이다.
도둑이 칼을 들고 덤비는 것보다 더 큰 무서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미움도 사랑도 없는 비정 그것이 아닐까. 칼 든 도둑 한 사람마저 없는 오직 단 한 사람이 남은 세상을 상상해보라. 하늘과 산이 무서울 것이며 들판과 시냇물도 무서울 것이다. 비정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 남은 사람은 차츰 들판을, 산을 닮아가고 사람이 아니게 되어 갈 것이다. 사람이 사람 아니게 되어가는 공포.
처음 서희가 길상이하고 혼인할 것을 원한다는 얘기를 이동진이 꺼내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평소 서희의 마음을 짐작했으면서도 전혀 처음 듣는 놀라움이었다. 밤길에서 허공을 디딜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리고 격해지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손등을 물어뜯은 것이다.
반 이상을 태운 용정에 김훈장이 기거할 곳이 없을 때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마땅한 곳을 찾고 보따리를 들고 이사해준 사람이 길상이다. 김훈장의 사람됨이 잔인해서도 아니고. 고의로 한 말이 아니다. 사람됨이 잔인했거나 고의로 한 짓이라면 미워해버리면 그만이다. 등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김훈장은 오히려 착한 편이다. 정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리사욕도 별반 없는 사람이다. 고지식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로서는 당연하다. 추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의 말이다.
‘결코 반대 그 자체가 부당했다는 것은 아니다.
부당했던들 어떠랴. 아픔이 있고 미움이 있고 실낱같은 괴로움이라도 있었더라면.
몇백 년의 세월이, 몇백 년의 제도가 빚어낸 메울 수 없는 심연,
이켠과 저켠이 결코 합칠 수 없는 단층, 왜 그것을 여태껏 못 깨달았는가.
아니 아니 못깨달았을 리가 있나.’
길상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아는 듯합니다. 일단 길상은 마음씨가 푸근한 월선이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라도 어쨌든지 맛난 음식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워야 한다는 것을 길상을 통해 배웁니다. 음식을 먹은 후에는 아무리 마음이 괴로워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웁니다. 길상은 창고 정리에 몰두하면서 지난 밤을 온통 휘젓던 고통에서 놓여납니다. 길상은 창고에 박혀서 재고 조사에 열중하여 장부 정리를 말끔하게 끝냅니다. 지난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운 길상은 오후 세 시쯤 되자 창고방에서 냄새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잡니다. 피곤함에 절었으니 푸욱 숙면을 취하고 나면 심신도 개운해질 법합니다. 그런데 그만 길상의 번뇌는 꿈속까지 쫓아오고야 맙니다.
괴로운 잠에 빠져들어갔다. 허공에 떨어지는 꿈을 연달아 꾼다. 쫓기는가 하면 쫓고 벼랑인가 하면 벌판, 쫓는 사람 쫓기는 사람은 서희였다가 상현으로 변하기도 했다.
길상은 서희가 자신과의 혼인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치도 서희앞으로 다가서려 하지 않습니다. 서희가 상현에게 오누이 결의를 다지고 길상과의 혼인을 표명했던 때는 서희 나이 열아홉의 여름이었습니다. 그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났던 여름이 다 가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길상의 과부 장가 소문만 무성한 채 가을도 다 지나가고, 이제 십이월로 접어듭니다. 계절은 바뀌고 바뀌어가건만 길상과 서희의 혼인은 진척 없이 제 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길상과 과부 옥이네가 회령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만 서희 귓전에 날아듭니다.
누가 어느 정도의 소문을 서희에게 옮겨놓았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회령의 일을 서희는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가느다란 실오라기 한 가닥 같은 귀띔만 잡아도 예리한 추리력은 맹렬하게 인내 깊게 전체를 규명해나가고야 마는 그런 지독한 성미였으니까. 그간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줄곧 침묵이 계속 되어 왔었다. 그것은 바람 없는 바다같이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조용했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생물들이 끊임없는 사투를 벌이고 있을 바닷속처럼, 서희 심중 깊은 곳에서는 모조리 동원된 지혜와 걱정이 무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으리라는 것을, 일거수일투족 그 습벽을 잘 아는 길상으로서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 길상은 회령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희는 깨어서 길상이 나가는 것을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사업을 위한 회령행이지만 옥이네가 있는 회령인 한 서희의 기분이 심상할 리 없다는 것을 길상은 쓴약을 머금듯 느낀다.
길상은 자신과의 혼인을 원하는 서희의 의사를 철저하게 묵살합니다. 서희는 기다림에 지쳤을까요? 드디어 서희는 길상이 과부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진상 파악에 스스로 나서고자 합니다. 설사 그 소문이 사실이더라도 혼인을 포기할 서희는 아닙니다. 소문을 잠재울 수 있는 해결책을 기필코 찾아내고 마침내 길상과의 혼인을 성사시키고야 말 서희입니다. 서희는 옥이네를 만나기 위해 회령행 마차를 타기로 작정하고 길상과 단 둘만의 외출을 시도합니다. 서희의 심중에는 이미 ‘청혼’의 기회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릅니다.
한집에 살면서 서희 얼굴을 못 본 지가 보름이 넘는다. 어젯밤 몸이 아파 회령병원에 가야겠다는 전달을 받았다. 길상은 걱정을 하면서 한편으론 서희를 보는 것이 불안스럽다. 겁이 나기도 한다. 말이 상전이지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고락을 함께 하면서 서희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순한 사랑일지라도 우러러 뵙는 것은 아니요, 내려다보며 어린 누이같이 응석과 못된 성미를 허용해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동진을 김훈장 방에서 만난 이후부터 길상은 서희가 두렵다. 서희의 희망을 거절했었다는 죄책감에서는 물론 아니다. 오히려 지순한 무엇인가를 거절당한 것은 이편이며 거절한 것은 그편이 아니었던가? 길상의 두려움은 서희에 대한 자기 의식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는 데 있었다.
서희가 역앞에 나타났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진갈색빛 긴 망토가 작은 몸을 감싸고 있다. 손에 낀 가죽 장갑도 갈색이다. 처음 입어본 옷인데 오랫동안 옷맵시를 익혀버린 듯이 자연스럽고 서희에게는 썩 잘 어울렸다.
‘어디가 분명 아프긴 아프신 모양이야. 안색이 좋지 않아.’
길상은 미간을 모으며 유심히 서희를 바라본다. 여위어서 서희의 눈동자는 커다랗고 한결 짙어진 눈시울은 눈 가장자리에 병적인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엷고 부드러운 입술도 다소 푸르스름한 것 같다. 그러나 병적인 음영과 초췌해 보이는 얼굴은 오히려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여러 시선이 서희에게 집중된다. 아무튼 보는 사람에게 황홀감을 주기보다 괴로움을 주는 서희의 미모, 용정 바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부린 여자이던가. 전설과 같은 얘기들. 어떻게 하여 저 흑요석같은 눈동자의 어린 여자는 어마어마한 그 재산을 삼사 년 동안 쌓아 올렸을까. 기적이다. 그 기적을 상징하는 것이 독특한 그의 용모다. 기품과 요기와 교만과 총명의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여자.
서희의 시선은 일순간도 머문 곳이 없었다. 길상에게조차 단 일별을 허용치 않고 마차에 오른다. 털을 바닥에 깐 작은 단화, 사람들이 마지막 본 것은 서희의 그 귀여운 구둣발이었다.
서희의 시중을 들던 새침이가 외출에 동행하지 않으니 길상은 당황합니다. 양반가 규수 서희는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새침이를 대동했으니 말입니다. 새침이는 길상에게 여행 가방을 건네주고는 실쭉 웃으며 가버렸습니다. 여자인 서희 시중을 누가 들 것인지 남자인 길상은 난감해집니다. 지금까지 생전 하지 않던 일을 감행할 정도로 서희에게 길상과의 혼인은 간절한가 봅니다. 용감한 여자, 서희는 길상과의 혼인을 어떻게 성사시켜 나갈까요? 길상은 지금까지 줄곧 봐왔던 애기씨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서희 모습에 의혹이 증폭됩니다.
‘왜 새침이를 안 데리고 가실까? 이상한 일이다.
그는 그렇고 여관에 묵게 될 텐데 시중은 누가 들어주지.
정말로 아픈 걸까? 아프지 않은 것을 아프다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거짓말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단 말이야. 역시 어디가 아프신 거야.’
마차 안에서 길상은 모포를 서희 무릎에 덮어준다. 서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차는 얼어붙은 외줄기 길을 따라 출발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겨울 하늘, 바람은 스산하게 불지만 쾌적한 공기다. 끝없이 끝없이 회백색으로 펼쳐진 벌판이 연방 마차 창밖에서 사라진다. 서희는 변함없는 자세, 돌덩이로 굳어버렸는지 고개 한번 돌리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심중만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성싶다. 다만 다물어진 입매에 어떤 결의가 엿보일 뿐이다.
손님들은 점심 요기를 위해 모두 마차에서 내려 주막으로 몰려갔다. 길상은 점심 봉지를 서희에게 내밀었다. 서희는 고개를 한 번 저었을 뿐이다.
“저는 주막에 가서 먹겠습니다. 점심 드십시오.”
서희는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길상은 빈 마차 속에 서희를 혼자 남겨두고 나온다. 나온 순간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옥이네였다. 처음 이곳에서 옥이네를 만났던 생각이 난 것이다. ‘왜 옥이네 생각이 났을까.’ 옥이네와 마차 속에 앉은 서희 사이에 줄이 쫙 그어진 것이다. ‘그 여자하고 애기씨가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제에기! 될 대로 되겠지.’
주막에 들어서자마자 길상은 술을 연거푸 몇 잔 들이킨다. 속이 얼얼한 독한 술이다. 길상은 서희를 안중에 두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안중에 두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내 이 두 다리는 성도 낯짝도 모르는 내 부모가 만들어준 내 다리란 말이야.
어디든 내 맘대로 갈 수 있단 말이야. 누가 잡느냐 말이다.!
최서희의 남편? 흥, 종신 종놈 삼으려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만했으면 음, 그만 해주었으면 땅밑의 윤씨부인께서도 날 의리 없는 놈이라 하지는 않을걸.
싫다 싫어!
양반놈들 위해 내가 왜 살아? 난 간다. 간단 말이야.
애기씨? 아니 최서희 이계집애야!’
길상은 마차가 떠나기 직전까지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술 냄새를 피우며 혼란한 의식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마차에 올랐다. 길상은 혼자서 마음속으로 그야말로 광태를 부렸다.
‘어떠시오? 애기씨!
길상이 술 처먹은 꼴 보고 역겹지도 않으시오?
도도하고 오만무쌍하고, 내가 그 그물에 걸릴 성싶소?
종신 종놈은 안 될 겝니다. 안 되고말구요!
애기씨 어릴 적에 나무를 깎아서 신랑 신부 양반 상놈 기생에다 중놈, 뜻대로 소원대로 다 만들어드리긴 했습니다만,
난 나무토막은 아니오! 피가 통하고 썩는 살점을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최서희! 당신하고 꼭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야합이라면 모르까? 당신 어머니는 야합이나 했었지만 최서희가 어디 그럴 여자요?’
회령에 도착했다. 길상의 마음속의 광풍은 계속하여 불고 있었다. 길상이 서희를 데리고 한양여관으로 들어섰다. 여관집 주인 여자는 서희의 자태를 보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길상은 낯선 여관에 서희를 내버려두고 뒷날 아침 식사할 무렵이 되어서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길상이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방문을 열었다. 서희는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서 있지만 말고 앉아.”
무릎을 꺾고 앉는데 억만년과도 같은 침묵이 흐른다.
입을 떼기론 서희가 먼저였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날 좀 데려다 주어.”
“병원에 말씀입니까?”
“아냐. 그 여자 집에 말이야.
길상이 살림을 차렸다는 그 여자집에 날 데려다주어. 나 그 여잘 한번 만나고 싶어.”
“뭐라 말씀하셨지요!”
“왜? 안 데려다주겠다 그 말이냐? 나 그 여잘 한번 만나고 싶어.”
길상은 고개를 들고 서희를 쳐다본다.
분에 못이겨 이글이글 타고 있을 줄 생각한 눈은 의외로 설움에 가득 차 있다.
그런 서희의 눈은 처음 본다.
“안 됩니다! 애기씨가 거기 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테야.
모든 굴욕을 참고 이곳에까지 왔어. 이대로 용정에 돌아갈 성싶으냐?”
“그러면 저는 애기씨한테 하직 인사를 올릴밖에 없겠소.”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는 이곳에서 떠나지 않을 테니, 그 여잘 보기 전에는.”
노한 길상의 눈을 똑바로 받아내는 서희의 눈빛은 아까 그 서러움이 아니었다.
증오와 원망과 용서하지 않겠다는, 목숨을 내어건 그런 치열한 눈빛이다.
한치의 여유도 없다.
길상은 회령에서 운영하는 복지곡물상 일을 하러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희와의 언쟁을 계속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는 내리 술만 마시었고, 오늘은 아침도 굶은 채 곡물상으로 나오고 말았으니 기운이 빠져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입니다. 곡물상에서 벌어지는 급한 일들을 마무리 지은 후, 길상은 요기를 하기 위해 허술한 뒷골목 음식점으로 향합니다. 손님이 없는 아침나절 식당에서 길상은 혼자서 또다시 술판을 벌입니다. 참으로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겨운 길상의 고뇌 찬 젊은 나날들입니다. 현재 길상은 서희와 옥이네가 함께 있는 회령이라는 공간이 감당하기 벅찼을 것도 같습니다. 길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술을 들이킵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의 갈등 상황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따라가 봅니다.
‘가고 싶은데 왜 못 떠나나.
있고 싶은데 왜 떠나려 하는 게야. 어느 게 진심이냐 말이다. 어느 편이 진심이냐 말이다.
서희는 여관방에 도사리고 있겠지. 울고 있진 않을 게야.’
‘오기일까. 이목일까. 배배 비틀어진 마을일까.
못난 사내는 되기 싫다 그건가?
그렇지? 너는 지금 기가 죽어 있어. 못난 놈이라고 말이야.
쩨쩨한 놈이라구 말이야. 그래서 술맛이 이리 쓰고 괴로운 게냐?’
‘오 년 전에 그렇지 오년 전의 일이구나. 최참판댁을 습격해온 마을 사람들과 합류했을 때 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조준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너는 서희를 위해 토지 문서를 찾으려고 뛰어다녔다. 나라의 비운보다 서희 비운에 너는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그때 넌 평사리 벽촌의 작은 개구리였어.
지금은 달라. 넓은 만주 벌판에 서 있단 말이다. 잘난 사내들, 쓸개가 썩지 않은 사내들이 모여드는 곳이란 말이다. 이곳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나. 고향 잃은 가난한 내 겨레가 이불 짐에 솥단지 하나 얹고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영팔이아제는 청나라 사람들 땅을 부치러 떠났고, 용이아제는 벌목꾼이 되어 떠났다. 지난날의 이부사댁 나으리, 슬기로운 선비로 우러러보았었던 이동진 씨, 그 사람조차 지금 내 눈에는 개새끼로 보인다.
그런데 너는 어떠냐? 너는! 한 계집아이를 잊지 못하고 꾀꼬리새끼를 잊지 못하는 넌, 넌 더한 개새끼다! 한데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무엇을 타협하려 했나? 서희와 혼인할 생각을 했지? 당당하게 좋아하는 여자를 거머채는 게 뭐가 나쁘냐구? 아니, 아니다.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은 게 너 본심 아니었나? 안 그렇단 말이냐?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지?’
‘어릴 때부터 넌 구천이 그 사람을 늘 부러워했다. 천상에서 신선이 내려온 것처럼 늘 그 사람에 대해선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다운 별당아씨를 데리고 도망간 것을 이 세상에서 젤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했었다. 너는 서희를 그런 꿈으로 바라보아왔다. 그러나 서희는 별당아씨는 아니었어. 흥, 무슨 지랄 망근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게야.’
‘옥이네하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냥 용정으로 가자 할까? 모두 헛소문이니 믿지 말라 할까. 아니면 관계를 끊을 테니 그냥 돌아가자고 할까. 서희하고 혼인하겠다 할까. 거짓말도 방편이라 했어 우선 저러고 뻗쳐 있는 서희를 여관방에서 끌어내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에잇 빌어먹을! 가보자면 가는 게지 못 갈 건 뭐 있어! 과부건 언청이건 상전 아씨께서 선보겠다는 걸! 고마운 얘기 아니냐 말이다! 제에기랄.’
‘결단을 내려야지, 결단을.
내가 가면 서희는 혼자 남는다. 무너질 것이다.
서희의 소망, 서희의 인생은 무너지고 말겠지.
간다면 어디로 가나? 가는 게 문제가 아니야. 떠나는 게 문제다. 떠나는 게, 떠나버리는 게........ ’
길상은 몸은 서희와 헤어지더라도 마음은 도저히 서희와 헤어질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합니다. 길상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념에 사로잡혀있을 때, 서희는 옥이네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 나설 준비를 합니다. 길상이 데려다주지 않겠다고 하니 스스로 찾아나서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길상과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혼자 쓸쓸히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고 얽힌 문제가 있다면 협상하고 타협을 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서희는 치욕감을 무릅쓰고 여관집 주인 여자를 불러 묻습니다.
“혹 댁에선 아는지 모르겠소?
나하고 함께 온 그 사람이 살림을 차렸다는 집 말이오.”
“본시 옥이네는, 우리 여관에 있었답니다.
계집아이가 하나 딸린 의지가지할 곳이 없는 과부지요. 스물세 살인가....
예쁘장하게 생긴 편이지요. 고생만 안 했더라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사는 집이라니까.”
“가만히 있자...
아, 우리집의 석이란 놈이 알는지 모르겠군요. 석아! 석이 거 없나?”
“무슨 일이세요”
“너 옥이네, 그 여자 살림을 차렸다는 집 알지?”
“살림을 차리기는요? 삯바느질 시작한 걸요.”
“그 집 알면 용정서 오신 안손님 좀 뫼셔다 드려야겠다.”
서희는 어제 들어왔을 때 그 차림 그대로, 진갈색 긴 망토를 걸치고 갈색 가죽 장갑을 끼고 털 단화를 신고서 석이를 따라 걸어 나간다. 석이를 따라가는 동안 서희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석이는 얼굴을 찌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삼키며 생각한다.
‘참말로 예쁘다.
아기씬 옥이엄말 왜 찾아가는 겔까? 침모로 데려갈려구?
김씨 땜에 혼내줄려고? 껌 껌 하고 좁은 골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소년은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부티와 귀티를 한껏 발산하는 우아한 성장 차림을 한 서희는 허름한 오막살이집들이 옹기종기 흩어져있는 빈민 동네에 들어서게 됩니다. 서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처럼 몹시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사는 동네를 본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길상이 덕분에 서희는 여러모로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이토록 가난한 동네에 셋방을 얻어 사는 옥이네의 처지는 얼마나 곤궁할지 저절로 짐작이 됩니다. 서희는 옥이네의 방문 앞에 드디어 다다랐습니다. 호화로운 양반규수 서희는 궁핍한 과부 옥이네와 어떻게 맞서게 될까요?
옥이네가 세든 집은 허술한 오막살이였다. 허술한 초가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었다. 석이는 옥이엄마가 사는 방문 가까이 가서 옥이엄마를 부른다. 그리고는 인사도 없이 달음박질쳐서 달아나버린다. 방문을 열고 얼굴만 내보인 옥이네는 서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안색이 싹 변한다.
“어디매서 오셨음 둥?”
서희는 눈시울을 치켜올리며 얼굴만 내민 옥이네를 응시한다.
포수가 짐승을 겨냥하듯이. 앙상하게 여윈 얼굴이다.
머리칼에는 솜가루가 앉았는가 희뿌옇다. 아무렇게나 걸쳐입은 옷매무새.
“잠시 들어가도 좋겠소?”
“옛꼬망. 방이 누추해서,이르 어쩌겠슴둥?”
옥이네는 옥이를 방구석에 떠밀어붙인다. 솜뭉치도 아이 곁으로 밀어붙인다. 옷감을 말아들이고 가위 실꾸리를 반짇고리에 집어던지고, 앙상한 팔이 거칠고 재빠르게 움직였으나 천조각 솜부스러기는 여기저기 굴러 있다. 옥이네는 삯바느질로 남자 바지에 솜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서희는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와 앉아 있었다. 몸을 도사린 어린 옥이 손에는 알맹이도 없는 캐러멜 빈 곽이 꼭 쥐어져 있었다. 방안 흙벽에는 주렁주렁 못이 박혀 있었다. 그곳에 눈에 익은 쥐색 남자 목도리 하나가 축 매달려 있다. 길상의 것이다. 허둥지둥, 목에 감는 것을 잊어버리고 간 모양이다. 어젯밤 길상이 이곳에 와서 묵고 간 것을 알아차린 서희는 아무래도 처녀인 만큼 얼굴에 핏기를 모았으나 이내 일그러진다. 보기 흉하게 비참하게 일그러진다.
“살림을 차렸다기에, 왔더니 찢어지게 가난하구먼.
길상이도 천하에 못난 사내군.”
다음은 침묵의 계속이다. 차츰 침묵은 옥이네의 완강한 의지로 굳어져가는 것 같았다.
수그린 그의 콧날에 자존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신 서희의 격노는 식어갔고 눈이 잔인하게 빛난다.
“애기 엄마. 우리 집에 가지 않겠소. 침모로 가자 그 말이오.
어렵지 않게 해주겠소.”
옥이네는 처음으로 눈을 들어 서희를 똑바로 본다.
의심과 경계의 빛이 팽팽하다.
“싫습니다. 김씨 그분 저하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동정을 받았습니다마는 형편이 펴이면 갚아드리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펴일 날 있으면 갚아드리얍지요. 그리 생각을 하고 있으니.”
목소리가 댓살같이 곧게 울려온다.
서희 얼굴이 긴장된다.
“그 사람은 애기엄마랑 혼인할 생각을 하는데도 애기엄만 아니 하겠다 그 말인가요?”
서희는 거짓없이 말했던 것이다. 서희가 거짓 없이 말했다는 것은 길상이 이 여자와 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서희는 마음속으로 뇌인다.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니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설움때문이야.
그렇다면 길상은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들려는가’
서희는 눈길을 여자도 목도리도 아닌 곳으로 옮긴다. 서희가 알기로도 길상에게는 좋은 혼처가 많았다. 그것을 다 마다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들은,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것이 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아닙니다. 거짓말 하는 걸 어째 모르십니까.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째 새총각 처지에 어째 애까지 딸린 과부댁하고 혼인을 하겠습니까?
사람을 괄시하면 안 됩니다.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러잖아도 그분이 도와 준 돈을 갚겠다는 그 일념으로
밤 새워가면서 바느질을 하는 하고 있다고 가셔서 말씀 전해주시오 ”
이번에는 곧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비둘기가 날개를 퍼득거리듯이 강하게 흔들린다.
과부 옥이네는 극빈층도 떳떳하고 당돌할 수 있으며 배려하고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살림이 가난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행색이 초라하고 남루하지만 공짜를 바라거나 남의 것을 넘보지도 않습니다. 부자에게 손 내밀어 구걸할 생각은 아예 없는 당찬 여자입니다. 티끌만한 비굴함도 찾을 수 없는 꼿꼿한 여자입니다. 체면을 차릴 줄 알고 염치를 아는 옥이네의 단정한 모습에서 인간의 품격을 봅니다. 자기 목숨, 자기 자식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아등바등하는 옥이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치열한 생기는 인간 생명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립하고자 힘쓰는 옥이네의 드센 활기는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길상의 과부 장가 소문에 대한 진상 파악을 마친 서희는 옥이네 셋방을 나와 낯선 거리를 걷습니다. 옥이네를 찾아갈 때는 소년 석이가 동행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오롯이 혼자입니다. 온전히 혼자 되어 무작정 걸으면서 서희는 옥이네에게서 방금 받았던 인상을 상기합니다. 기가 센 서희가 옥이네를 ‘드세다’라고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쿡, 터져나옵니다. 기가 센 것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최서희가 말입니다. 어쩌면 서희는 옥이네에게서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요? 옥이네를 자신과 똑같이 ‘고아같다’라고 여기니 말입니다.
서희는 바람 부는 거리를, 펄럭이는 망토자락을 꼭 쥐며 걷는다. 세상에 나서 오늘까지 혼자 걸어보기는 처음이다.
더군다나 집 떠나온 낯선 거리를. 서희는 거리를 눈여겨보지 않고 걸어간다. 무턱대고 걷는데 방금 헤어진 옥이네가
어른거린다.
‘북쪽 여자라서 그럴까? 성질이 드세다.’
앙상하게 여윈 얼굴, 솜가루가 앉은 뿌연 머리카락,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옷매무새, 눈앞에 밟힌다.
미움도 동정도 아니면서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가 마음에 실려온다.
“고아 같다.
뭐 언제는 내가 고아 아니었었나? 그렇지만 더욱더 고아 같다.”
어쩐지 한반도 남쪽에 사는 서희나 북쪽에 사는 옥이네, 두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입니다. 서희와 옥이네는 빈부격차가 천양지차로 엄청나는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길상의 이상형은 적어도 내숭이나 아양을 떠는 음흉한 여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길상은 서희더러 보석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옥이네는 극도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어엿이 자식을 키우느라 악착스레 살아가니 더 빛나는 진귀한 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홀로 걸어가는 서희에게로 날아갈 듯 홀가분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옥이네의 댓쪽같은 반듯함이 서희에게 건네준 자유입니다. 옥이네의 떳떳함은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옥이네의 올곧은 성품은 서희에게 개운하고도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던 것입니다. 옥이네가 서희에게 베풀어준 자유는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보배로운 자유입니다. 서희가 지금까지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진품 명품 자유입니다.
못에 매달린 목도리를 보았을 때 서희는 여자를 집에 데려다놓고 길상에게 고통을 주리니 생각했었다. 길상이 자기를 낯선 여관에다 내버려두고 여자 집을 찾아간 행위가 애정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 그 무자비한 감정을 무엇이 풀어놨나. 풀린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희는 스스로, 자기 자신마저 질곡에서 풀어버린 것이다.
용정에 쌓아 올려 놓은 자기 성으로 돌아간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나 그 끈질긴 원한에 사무친 보복심을 내버린 자유, 무겁고 숨막히는 철갑을 벗어버린 자유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 다 버리고 어디든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바람에 날려가는 나뭇잎같이 왜 슬프고 외로운지, 고아의 느낌이 가슴을 저미는지 서희는 알 수가 없다. 덮어놓고 걷는다. 하늘 끝까지 내처 걸어갈 것처럼 걷는다.
서희는 걷고 걸으면서 무한한 자유로움과 절절한 외로움을 한꺼번에 만끽합니다. 낯설다는 것은 사람 본연의 감정에 솔직하도록 부추겨줍니다. 서희는 길상을 향한 연정에 용기를 내고자 합니다. 옥이네 방에 걸려있던 길상의 목도리가 생각나니 새목도리를 사주고 싶어집니다. 양반 상전이 시중드는 아랫것이 사용할 물품을 직접 골라서 사는 행위는 괴이한 일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서희는 길상을 위해 그 별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서희는 길상을 따뜻하게 감싸줄 목도리를 고르면서 심사숙고합니다. 선물을 신중하게 고른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거리에 일본상점이 눈에 띈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조선 여자인 것을 깨달은 점원은 더욱 허리를 굽신거린다. 조선 사람이면 모두 초라하고 거지 같다는 소견머리로서는 서희의 우아한 모습은 일종의 경이였을 것이다. 서희는 여러 개의 목도리를 차례차례 넘겨보고 나서 그 중에 진갈색을 하나 뽑아낸다. 상점을 나선 서희는 전혀 뜻밖의 자기 행위에 놀라고 당황한다. 후회하는 것은 아닌데, 길상에게 이 목도리를 화를 내며 주어야 할지 잠자코 내밀어야 할지 난감하다.
서희는 길상의 목도리를 찬찬히 골라서 샀습니다. 커플이라는 것을 공개선언이라도 하려는듯 자신이 입은 망토 빛깔과 똑같은 진갈색으로 말입니다. 길상의 과부 장가 소문의 진상 파악을 마무리지었으니 이제 서희는 혼인을 추진할 동력을 마음놓고 얻은 셈입니다. 낯선 거리를 걷고 걸어서 여관으로 되돌아오는 서희의 발걸음은 아침나절 여관을 나설 때와는 판이했을 듯싶습니다.
목도리를 포장한 선물을 들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고주망태가 된 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길상이는 술기운을 빌어 사랑을 고백할 참입니다. 길상의 사랑 고백은 다정다감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격렬하고도 신명나는 저항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혈통 때문에 서희에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던 긴긴 세월 가슴에 품었던 연정을 신랄하고도 통쾌하게 토해냅니다. 그러한 대담무쌍한 길상의 거역을 가만두고만 볼 서희가 아닙니다. 길상이보다 더 거칠게 저돌적인 프러포즈로 응수합니다. 길상의 고백과 서희의 청혼은 어찌 이다지도 맑고도 투명한지요. 욕설과 비아냥이 마구 춤을 추건만 영혼을 깨끗하게 휑궈주는 듯합니다.
서희는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길상은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차갑게 서희를 쏘아본다. 서희는 장승처럼 선 채 길상을 내려다본다.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구경 자알 하고 오십니까? 아가씨.” 애기씨가 아니라 아가씨라 부른다.
“나 오늘부터 최서희 종놈 아니기로 했소이다. 본시 문서 없는 종놈이고 보니 몸값 치를 필요는 없겠구요.
그 그리고 그동안 뼈가 빠지게 머슴살일 했지마는 세경 달라고도 아니 하겠소.
피장파장 줄 것 받을 것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 인간 대 인간으로 나갑시다요.
그래 불쌍한 과부댁 구경은 자알 했습니까?
얼마나 시주를 하고 돌아오시었소?
얼마에 사시었소?
허나 그렇게는 안 됐을 걸요?
섬섬옥수 내민 손이 부끄러움이나 아니 당했을까, 이 길상이놈이 걱정했수다.
아가씨!
돈방석에 앉은 놈만 도도한 줄 아시오? 가난한 놈도 도도할 수 있단 말입니다.
양반네만 기고만장인 줄 아시오? 상놈 백정도 기고만장 못하란 법 없지요.
대명천지에 돈 있고 족보있는 사람들만 사는 줄 알았다간 큰코 다칠 게요.
그래 최참판댁 아가씨!
그 여자 돈 안 받지요? 이 정든 님의 돈도 안 받는 여자요.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흥, 천하를 주름잡을 텐가? 어림도 없다.
넌 일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단 말이야!
난 지금이라도 널 희롱할 수 있어.
버릴 수도 있고 흙발로 짓밟을 수도 있고 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다, 그 말이야.
나를 부처님 사촌쯤을 생각한다면 그건 큰 잘못이지.
내 핏속엔 대역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게야.
아니 그보다 식칼들고 고갯마루를 지키는 산도둑놈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
어조를 싹 바꾸며 반말지꺼리다. 장승처럼 서 있는 서희 얼굴에 경련이 인다.
드디어 서희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놈아! 너 나를 막볼 참이구나. 죽여버릴 테다!”
다음 순간 목도리를 싼 꾸러미를 길상의 얼굴을 향해 냅다 던진다.
서희는 방바닥에 주질러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어릴 때처럼, 기가 넘어서 숨이 껄떡 넘어갈 것 같다.
언제나 서희는 그랬었다.
슬퍼서 우는 일은 없었다. 분해서 우는 것이다.
다만 어릴 때와 다르다면 치마꼬리를 꽉 물고 울음 소리가 새나지 않게 우는 것뿐이다.
“난 난 길상이하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다 버리고 달아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그 여자 방에 그, 그 여자 방에서 목도리를 봤다 말이야.
그 꾸러미가 뭔지 알어? 아느냐 말이야!
목도리란 말이야 목도리. 헌 목도린 내버려! 내버리란 말이야.”
포장지를 와득와득 잡아찢는다. 목도리를 집어든 서희는 길상의 면상을 향해 또다시 집어던진다.
진갈색 목도리가 얼굴을 스쳐서 무릎 위에 떨어진다.
길상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들지만 무릎 위에 떨어진 목도리를 집었다간 불에 덴 것처럼
놓고, 또 다시 집었다간 놓고 하면서 서희의 울음을 그치게 할 엄두를 못낸다.
드디어 그는 목도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서 마치 훔쳐서 달아나는 도둑놈처럼 방을 뛰쳐나간다.
제 방으로 돌아온 길상은 우리 속에 갇힌 짐승처럼
“미쳤을까? 애기씬 미쳤을까?” 중얼거리며 맴을 돈다.
서희의 프러포즈는 서희답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을 죄 다 드러내서 솔직하게 토로하니 말입니다. 서희의 프러포즈는 서희답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길상과 도망까지 갈 궁리를 했다고 발설하니 말입니다. 어린 자신을 버려두고 머슴 구천이와 달아난 엄마 별당아씨를 절대로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던 서희입니다. 그런 서희가 하인 신분과 다름없는 길상을 향한 자신의 연정을 밝혔다는 것은 엄마 별당아씨의 감정이 되어봤다는 것을 시인한 셈입니다. 서희가 엄마와 같은 감정을 경험했다는 것은 엄마 별당아씨에 대한 화해의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길상에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서희는 엄마 별당아씨가 안락한 별당과 어린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야만 했던 그 깊었을 고뇌에 비로소 공감하고 수긍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길상은 서희의 변화된 그 모습에 얼마나 경악하고 또 감탄했을까요? 별당아씨와 함께 달아났던 구천, 즉 김환을 부러워했던 길상이었으니 말입니다.
다음날 아침 길상은 서희를 몰아댔다. 용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두 남녀는 함께 길을 걸었고 마차에 올랐으나
성난 얼굴로 서로 외면하는 것이었다. 상대편 얼굴 보기가 민망하기도 했으나 그보다 역시 아직은 서로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멍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푼수없이 지껄인 길상이나 체모 잃고 울어버린 서희, 푼수없었다고 느끼는
이상, 체모 잃었다고 느끼는 이상, 이들 사이에는 엄연한 거리가 있는 거고 거리를 의식하면 할수록 멍울은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더 깊은 고뇌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때론 절망이, 때론 희망이 교차하는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면서.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그것은 용정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뒤집힌 사건이다. 가파로운 내리막 길을 달리던 마차가 돌연 뒤집히면서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문화 정보 > 독서정보(기고.대담.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배우는 곁에 있을 때의 소중함 (0) | 2023.07.06 |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윤성근 작가 (0) | 2022.12.30 |
여자 나이 마흔, 박완서가 선택한 삶 (0) | 2022.04.12 |
경계(警戒)하는 경계(境界)인의 조각들 (0) | 2021.11.28 |
삶의 의미와 내면의 힘 - 정재우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의료윤리사무국장) (0) | 2021.1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