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에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적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아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銀行國(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肥料廣告(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 「鍾路五街」 전문
이 시의 화자도 그이지만 시에 등장하는 동대문을 묻는 소년도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도 말하자면
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듣고 보면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는 그소년의 등허리의 고구마 들도
어쩐지 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던 나는 이들의 그에 관한 얘기를 통해서,
또 그의 시를 통해서 신동엽 시인과 가까워졌고, 시비와 생가도 찾게 되었다.
황석영 작가, 염무웅 교수와 동행한 적도 있고,
구중서 교수와 동무가 된 적도 있고, 미망인인 인병선 시인을 따라 간 적도 있다. (p86)
신경림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우리교육 - 1998.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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