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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류시화. 정채봉

지구별 여행자 - 새점 치는 남자

by 탄천사랑 2022. 12. 10.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새점 치는 남자
태양이 눈부신 날이었다.
나는 캘거타에 있는 구세군회관 여인숙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싸구려 여인숙 안이 너무 어두워, 햇빛 찬란한 바깥세상이 오히려 구세군이었다.

사원 지붕의 늦잠 잔 원숭이가 합장하며 인사를 하고,
노천에서의 배고픈 명상을 끝낸 탁발승이 반갑게 손짓하며 나를 맞았다
땅콩 파는 남자는 내일을 기약하며 공짜로 한 줌 건네주고,
아침부터 소똥 밟은 서양인 여행자는 성스런 소똥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망연자실 서 있었다

나는 장발을 휘날리며 강으로 걸어갔다.
강에 세워진 커다란 다리 위에는 새점 치는 남자가 가부좌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이마에 흰색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지혜의 눈을 그려 넣은 중년의 바라문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반갑게 손짓을 했다.
외국인인 내게 갑절의 복채를 챙길 속셈이었다.
갑절이라지만 10루피(3백 원)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는 오랜만에 복점이나 쳐볼까 하고 새장 앞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점을 치는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남자는 내 이름을 묻고, 
그 다음에는 아주 중요하다는 듯 생년월일과 집의 방향과 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그런 뒤 새장 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새장을 두세 번 툭툭 쳤다
그러면 새장 안에 있던 초록색 앵무새가 걸어나와,
뭉툭한 부리로 앞에 놓인 카드들 중 하나를 뽑아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점괘 카드들은 마치 무굴 제국 시대 때 만든 것처럼 손때가 묻고 몹시 지저분했다

그런데 이 바라문의 앵무새는 약간 고집이 세었다.
몇 차례나 새장을 두들겨도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바라문이 새장을 90도 각도로 기울이기까지 하자,
앵무새는 마지못해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새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점괘 카드들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카드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부리를 꺾어 슬며시 주인 바라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바라문과 나는 새가 어서 카드를 뽑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앗! 하는 사이에 앵무새는 휙하고 날아가 버렸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도 놀라고 바라문도 놀랐다.
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넓디넓은 강을 날아 멀리 사라져 버렸다.

새 주인 바라문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들여 훈련시킨 앵무새가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자,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운이 나쁜 사람이오!"

그는 고뇌에 찬 얼굴로 세 번이나 그 말을 반복했다
새가 날아간 것이 유감이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 운이 나쁜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하지만 새점 치는 남자의 해석은 달랐다.
내가 너무 운이 나빠 뽑을 점괘가 없기 때문에,
새가 충격을 받아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몹시 흥분한 어조로 자기 생애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을 순간적인 재치로 만회할 줄 아는,
기발하기 짝이 없는 인도 점쟁이였다.

결국 앵무새도 충격을 받은 셈이 되었고, 
새주인도 충격을 받았으며, 그 말을 들은 나도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내 나쁜 운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새 주인에게 고스란히 앵무새 값을 물어줘야만 했다
다행히 인도는 앵무새 천지라서 새 값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인도에 와서 복점 한 번 쳐보려다가 엉뚱하게 새는 날아가 버리고,
새 값만 물어 준 셈이었다.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으니 그다지 운 나쁜 하루는 아니었다
나는 애써 새주인을 위로하고,
그가 나에 대해 더 불길한 말을 늘어놓기 전에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1년 뒤!
어쩌다 보니 나는 다시 캘커타의 그 다리를 걸어서 건너게 되었다
놀랍게도 새점 치는 바라문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마에 하얗고 붉은 신의 문양을 그린 것도 변함이 없었다
새장 안에는 지난번 새보다 훨씬 더 고집스럽게 생긴 앵무새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에게로 달려가 '나마스떼!'하고 인사를 했다
40대 중반의 이 새점 왈라(새점 쳐 주는 사람)는 처음엔 생소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긴 장발의 핑크색 바지를 보고 나를 알아보았다

그는 한순간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듯 
"아아, 당신이군!"하며 손바닥으로 자기의 이마를 쳤다
그러더니 나를 반기기는커녕 두 팔로 얼른 새장을 감싸안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또다시 새가 날아갈까 봐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새장 안의 앵무새도 몹시 기분 나쁜 노란색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가 아직도 그토록 강렬하게 
그 불운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약간은 반갑고 약간은 긴장된 자세로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내 검은색 선글라스 렌즈에는 새장을 껴안고 있는 바라문의 모습이 반사돼 있었고,
그 인도인 남자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 속에는
불길하게 선그라스를 끼고 장발로 어깨를 덮은 히피 여행자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

나는 앵무새에게라도 말을 걸어 보려고 
"시화! 시화!"하고 서너 차례 내 이름을 말했지만, 앵무새는 화가 난 듯 꽥꽥거렸다

점괘 카드에 무엇이 적혀 있나 싶어 그중 하나를 뽑아 들자,
펼쳐 보기도 전에 바라문이 낚아채 갔다

그날 그 새점 왈라는 끝내 내 복점 쳐 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은 도저히 흔들 수 없는 강한 신념 같은 것이었다.
이 장발 머리만 보면 앵무새가 자유를 찾아 날아가 버린다는.....
자유는 강한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그도 어느새 알아차린 것이다.

새점조차 칠 수 없는 가련한 신세였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때 날아가 버린 앵무새 탓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점 치는 남자와 작별을 했다.
10여 미터를 가다가 뒤돌아 보니, 
그때까지도 그는 앵무새 새장을 두 팔로 껴안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후에도 한 차례 더 그 다리를 건넌 적이 있지만,
그때는 릭샤를 타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차창으로 고개를 빼고 여기저기 살폈으나,
다리가 너무 복잡해 그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버스, 기차, 택시. 릭샤, 트럭은 말할 것도 없고
자전거, 행인, 수레, 소, 닭, 사두, 걸인, 원숭이까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술 나라와도 같은 그 다리 위에 초록색 앵무새를 가진,
눈 흰자위에 까만 점이 있는 매우 의심 많은 새점 왈라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이 글은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김영사 - 2002. 11. 27.

 [t-22.12.10.   20221209-14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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