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칼럼 - 제1528호. 2021.08.20」
사건 기자를 오래했던 소설가 김훈 씨는 육하원칙에 맞추어 범죄기사를 쓰기 힘들었다고 했다. 범죄인의 내면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내면을 모르기는 형사도 검사도 판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훈은 그래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칼의 노래’라는 작품을 쓸 때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는 가슴 찔리는 진리가 담겨있었다. 법을 공부할 때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게 내면의 고의였다. 행위는 본체인 내면의 발현이었다. 검찰과 법원은 공소장과 판결문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한 사건을 종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피고인의 내면은 없었다. 공소장의 행위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판결문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나의 사실을 보는 검사와 판사의 인식이 그렇게 똑같을 수 없었다. 변호사인 나는 피고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다. 인간의 내면은 정말 다양한 색깔과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내면을 변론에 담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관념이나 추상같은 내면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러 정황들의 추리소설 같은 치밀한 묘사가 필요했다.
박근혜 뇌물 사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박근혜라는 인물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원칙에 충실하려는 성향 같았다. 이권이나 뇌물에 관해서는 특히 거부반응을 보여왔다. 자살한 경남건설의 성완종 회장이 궁지에 몰려 여러 차례 간절히 면담요청을 해도 냉담했다. 아마도 신세를 졌던 걸 망각해서가 아니라 업자와 연루되는 듯한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돈 쓸 일이 많은 것 같았다. 전방부대 위문을 가더라도, 고아원을 방문해도, 종교인을 만나서 같이 밥을 먹어도 그들에게 줄 돈이 필요했다. 움직이면 돈이었다. 내부적으로 비서들을 부리는 데도 돈이 필요했다. 권력을 받쳐주는 게 현실의 돈이었다. 그렇다고 재벌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어느 날 청와대 운영을 위한 특별예산이 정보기관의 예산 속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청와대는 오랫동안 그 자금을 사용해 왔다는 보고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 창설 당시 정보기관의 예산 속에 통치자금을 은닉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전두환은 그 자금을 의식하고 중앙정보부장서리가 되기도 했다.
순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 돈을 써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느냐고 물었다. 법률 참모들은 이견이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하던 대로 청와대에 예산을 지원하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촛불혁명 정권이 탄생했다. 정권의 검찰은 박근혜가 받은 정보기관의 예산을 뇌물로 기소했다. 적폐청산의 차원이었다.
법은 혁명의 구호와는 달랐다. 판사들은 그 예산을 뇌물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박근혜의 내면이 그게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형법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법적으로 내면의 인식이 중요했다. 국정원장들이 잘 봐달라고 대통령에게 뇌물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대법관은 달랐다. 그걸 뇌물로 하라면서 사건을 고등법원에 되돌려 보냈다. 당사자를 만나지도 증인의 얘기를 듣지도 않는 대법원이었다. 그래도 대법관이 뇌물이라고 하면 그게 진실이 되는 게 우리의 법치였다. 그렇게 결정한 대법관은 박근혜의 내면을 꿰뚫어 본 것일까.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고관들을 보면 임금의 주장대로 사물을 보았다. 높은 의자가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의 내면을 내란 목적이라고 정의했다. 담당 대법관은 신군부의 시각대로 봤다. 의견을 달리한 다른 대법관들은 쫓겨났다.
긴 역사의 안목에서 보면 권력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 나라의 민주화 수준은 정치적 사건들이 법의 지배를 받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대법관은 정말 박근혜의 내면을 뇌물을 받아 챙긴 탐욕스런 인간으로 본 것일까. 뇌물이 아니라고 했다가 대법원의 명령에 의해 판결을 바꾼 판사는 과연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것인지 의문이다. 법이 시대의 닻이 되어야 한다. 혁명을 밀어주는 돛이어서는 법치는 없다.
글 - 엄상익 변호사
일요신문 - www.li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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