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 「적정한 삶」
월요병은 정말 월요병일까?
한때 일요일 저녁마다 사람들은 TV 앞으로 잡아두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숱한 유행어와 코미디 스타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던 KBS 개그콘서트.
당시 ‘빰빰빠~’ 하고 엔딩 시그널이 울리면, 으아악!! 하고 집집마다 비명을 질러 대곤 했다.
개그콘서트가 끝났다는 것은 곧 주말이 끝났다는 것이요. 끔찍한 월요일이 시작된다는 뜻이니까.
프로그램이 폐지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으니 일요일 밤의 풍경 또한 지나간 옛 이야기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최근 들른 어느 카페에서 스티비 원더의 〈part time lover〉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앉아 있던 많은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몸서리치는 모습을….
그 노래는 다름 아닌 개콘의 엔딩 시그널.
경쾌하고 신나는 명곡이 대한민국에서는 공교롭게도 월요병의 상징이 되어버린 셈이다.
‘월요병’이라는 단어가 1970년대 신문 기사에도 등장하는 걸 보니,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쉬는 것이 일반화된 산업화의 역사와 같이했으리라.
보통은 일요일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부터 발병이 시작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속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화가 나거나 신경질이 나거나 무기력을 호소하기도 한다.
느닷없이 슬퍼지고 한숨도 나오는 것이 꽤나 심각한 질병인 듯싶다.
이 병은 참 묘하고 요사스러운 것이 이름은 월요병이지만 언제 쉬느냐에 따라 어김없이 동일 증상이 발현된다.
수요일에 쉬는 사람들에겐 목요병,
긴 방학을 즐긴 학생들에겐 개학병, 휴가가 끝나가는 직원에겐 복직병이 된다.
그런데 월요병이란 이름과는 달리 막상 월요일이 되면 증상은 서서히 없어진다.
오전까지는 좀 기운이 없다가도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하거나 상사 몰래 주식 창을 쳐다보거나,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가십거리로 정신없이 떠들다 보면 조금 전까지 어디가 아팠던가 싶을 것이다.
사실 월요병이 아니라 ‘일요일저녁병’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맞지 않을까?
일요일 저녁이 힘든 이유는 ‘불안 심리’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심리 상태가 뭐예요?” 나를 포함한 많은 심리학자들은 ‘불안’을 손꼽는다.
심지어 저명한 심리학자 프로이트도 인간이 느끼는 최악의 심리인 불안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나의 저서 ≪지혜의 심리학≫에서 밝혔듯이,
불안을 심리학적으로 정리하자면 ‘원하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을 가질 때 생기는 불쾌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기피하고 싶은 심리 상태가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슬픔, 분노, 고통, 우울, 상실감,
그리고 정확하게 이름 붙이는 것도 어려운 복잡하고 묘한 심리 상태들.
그중에서도 불안을 최악 중의 최악으로 손꼽는 이유는
불안이 이 모든 부정적 감정의 증폭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회초리를 기다리는 아이의 고통
불안할 때 슬프면 진짜 슬프다.
불안할 때 아프면 너무 고통스럽다.
불안할 때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모든 부정적 심리를 두 배로 만들어 버리는 불안.
인간이 불안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 조상님들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위대한 말씀을 남겼겠는가?
요즘은 체벌이 없어졌지만 예전엔 잘못을 저지른 친구들이
칠판 앞에 나란히 서서 선생님의 매질을 기다리던 풍경은 매일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것이었다.
숙제를 안 해 온 다섯 명의 학생이 다섯 대씩 엉덩이를 맞는다고 생각해 보자.
체벌도 체력이다.
아무리 건장하신 선생님이라도 온 힘을 다해 매질을 하다 보면 기운이 빠지실 것이다.
그러니 물리학적으로 따진다면 마지막에 맞는 학생이 덜 아픈 것이 당연하다.
앞서 이미 20대나 몽둥이를 휘둘렀으니 선생님도 팔이 아프고 숨차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상하다.
꼭 마지막에 맞는 아이가 가장 격한 비명을 지른다.
아니, 사색이 되어 바들바들 떨다가 맞기도 전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한다.
가장 약한 매를 맞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아프다는 걸까.
이때 아이의 고통을 증폭시킨 기제가 바로 불안이다.
앞서 맞은 네 명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 때마다 마지막 학생의 마음은 어땠을까?
얼마나 아플까,
나는 언제 맞을까,
어디가 부러지진 않을까, 이제 와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기다리는 동안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불안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엉덩이를 가격한 물리적 고통은 실제 통증보다 몇 배로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팬데믹 시대 우리를 사로잡은 가장 강력하고 부정적인 정서 또한 ‘불안’이었다.
중국 우한에 미지의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부터 뉴스에서 다른 국가의 사망자들이 실려 나가는 장면을 볼 때,
집 근처나 직장 근처에 확진자가 지나갔다는 휴대폰 알람을 받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던가.
목이 따끔거리거나 열이 조금 나는 미미한 증상만으로도 극한 공포를 느끼지 않았던가.
나와 내 가족이 역학적으로 확진자와 마주칠 일이 없었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수치적으로 낮아도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다.
본래 인간에게는 ‘거래 가능한 가치’와 ‘불가능한 가치’가 존재한다.
자동차나 집, 돈 등은 거래가 가능한 가치에 속한다.
거래 불가능한 가치엔 종교, 생명, 신념 등이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거래 불가능한 가치’는
잘못될 수 있다는 약간의 가능성만으로도 어마어마하게 큰 불안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큰 불안이란 강도가 큰 불안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범위가 큰 불안이다.
불안의 특징 중 하나가 다양한 측면으로 전염된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로 시작한 작은 불안은 곧 생활 전반으로 확대된다.
미래에 대한 불안,
금전에 대한 불안,
다른 사고에 대한 불안,
심지어 원자력과 국가 경제, 세계평화까지 염려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소비, 국가, 경제, 민심까지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범용적 불안’ 탓에 팬데믹이 찾아오면
실제 사망자 수치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사회는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 이 글은 <적정한 삶>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경일 - 적정한 삶
진성북스 - 2021.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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