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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인생의 다섯 단계/1 그대는 백수다. 백수는 아름딥다.

by 탄천사랑 2021. 12. 30.

(에세이)  이외수 -  「청춘불패」

 

 

아, 돌아보면 눈물겨워라.
마음을 비우기 전에 내장이 먼저 비어 있었던 내 젊은 날.

 

 

그대여.
불어터진 자유,
불어터진 시간을 파먹으면서 오늘 하루도 약간은 참담하고 약간은 암울한 기분으로,

뒹굴뒹굴 하루를 잘 굴리셨는가.

 

그대는먹이를 포식한 봄날의 코랄라. 정오의 햇빛 속에 졸고 있는 칠면조.
빈둥빈둥.
오, 만고강산에 나른하고도 권태로운 그대 인생의 중심부. 그런데도 그대는 행복하지 않은 표정이다.

 

그대를 지금까지 공짜로 먹어주고 재워주고 압혀주신 부모님들은 갈수록 주름살이 깊어가는데
사대육신이 멀쩡한 놈이 자알 헌다.  자알 허는 것이다.
그대 자존심을 생각헤서 겉으로는 발설하지 못하시지만 속으로는 한심한 시키, 라고 혀를 차실 것이다.

 

하지만 그대여.
야속하게 생각지 말라.
그대를 지금까지 먹어주고 재워주고 입혀주신 부모님으로서는 응당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대여.
앉으면 암울하고 누우면 참혹하리라.
눈을 뜨면 초조하고, 눈을 감으면 불안하리라.
동쪽으로 가도 귀인을 만나지 못하고 서쪽으로 가도 귀인을 만나지 못하리라.
사면초가(四面楚歌).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도다.

 

본좌에게 허심탄회하게 물어보시라.
도대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본좌는 일찍이 초대 국제백수연합(國際白手聯合) 총회장을 역임하고

세계백수자활대책위원회(世界 白手自活對策委員會) 위원장을 거쳐

현재는 사단법인(私團法人) 백자방협(白自防協 백수자살방지협회) 이사장,
인터내셔널 화이트 핸드 그룹(Internatlmal Whlte Hand Group) 총수 등의

중책을 맡아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으며,

쓰면 작가 안 쓰면 백수로서의 양다리 인생을 개척하여
절망에 빠져 있는 모든 백수들에게 희망을 무료로 공급하고 있는 인물이다.

 

어느 기업 총수는 말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젠장. 세계가 넓은들 그대와 무슨 상관이며 할 일이 많은들 그대와 무슨 상관인가.
그대는 백수일뿐,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그대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는데
한숨은 갈수록 늘어가고 지갑은 갈수록 줄어드는데
어쩌자고 햇살은 저리도 눈부시며 어쩌자고 꽃들은 저리도 화사한가.

 

잔인하다 세월이여.
동서남북 분주하게 이력서를 던졌건만 종무소식.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속담도 이제는 단물이 다 빠져 버린 츄잉껌이 되었다.

 

하지만 그대여 서두르지 말라.
멀고도 험난한 인생길, 엎어진 김에 쉬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백수는 젊은 날 한 번쯤은 겪어야 할 황금의 터널.
백수를 경험하지 않은 젊음을 어찌 진정한 젊음이라 일컬을 수 있으랴.

 

차라리 나는 그대가 자랑스럽다.
그대는 아직 길들여진 사회적 동물로 전략하지 않았으며 그대는 아직 덜미 잡힌 연봉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았다.
젊은 날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한다는 명분으로

취직부터 하고 보는 젊음은 싱그러울 수도 없고 아름다울 수도 없다.

성급한 결정 한 번으로 꺾어진 젊음,
어쩌면 한평생 날밤을 새우면 서류를 정리하고 어쩌면 한평생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아부를 떨어야 할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가.

 

비록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는 하지만 그대의 직업은 그대의 인생 자체이면서 그대의 행복자체가 되어야 한다.
둥지를 자주바꾸는 새는 깃털이 많이 빠지고, 깃털이 많이 빠지는 새는 먼 하늘을 날지 못한다.
가급적이면 한자리에서 한가지 일에 평생을 바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인생의 절반은 성공이다.
나머지 절반은 실력 연마와 마음공부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대 마음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들을 모두 그대 마음 안으로 불려들이고
나보다 잘난 점들이 있으면 고개 숙여 배우기를 서슴지 말고

나보다 못난 점들이 있다면 끌어안아 감싸기를 서슴지 말라.

 

그대가 남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남들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따라 행복의 질량이 달라지며 인생의 심도가 달라지노라.

그토록 중차대한 일을 어찌 쉽사리 결정할 수가 있겠으며 어찌 쉽사리 얻어낼 수가 있겠는가.
부디 서두르지 말라.
지금 그대는 충분히 심사숙고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보라.
그토록 중차대한 직업을 너무나 쉽사리 결정하고 너무나 쉽사리 얻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재력 있는 회사에 끗발 좋은 직책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만심은 비대해진다.
그러나 갈수록 타성에 젖어들어 젊은 날의 포부는 순긱간에 퇴락하고 오로지 진급만이 희망이요,
오로지 출세만이 행복이 된다.
양심 같은 건 얼마든지 팔다리를 분질러버릴 수 있고, 도덕 같은 건 얼마든지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수 있다.
허지만 그들은 현실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자신의 영혼이 죽고 자신의 인생이 부패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알 먹고 자알 살아라.
양심과 도덕을 폭행하고 영혼과 인생을 살해한 장본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축복의 말이다.
그들이 그것을 원했으므로.

 

그대여.
우리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엄연히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돈을 많이 벌면 무조건 귀한 사람이고, 돈을 적게 벌면 무조건 천한 직업으로 취급 받는다.

 

하지만 과연 그렇까.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귀한 직업일까.
남이야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직업.
사리사욕, 탐관오리, 부정축제, 세금포탈, 직권남용, 온갖 비리의 구더기들이 득시글거리는 직업,
그런 직업도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귀한 직업일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 실격이다.
당장 동물농장으로 달려가 동물들하고 가족 사진 한판 찍어도 무방하다. (p93)
※ 이 글은 <청춘불패>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이외수  -  청춘불패: 이외수의 소생

그림 - 정태련 
해냄출판사 - 2009. 0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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