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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루이즈 글릭-마음챙김의 시/마지막 조각 글

by 탄천사랑 2021. 3. 26.

류시화 , 루이즈 글릭 - 마음챙김의 시

 

 

그럼에도 너는

이 생에서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는가?

그렇다.


무엇을 원했는가?


나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이 지상에서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 레이먼드 카버 / 마지막 조각 글 -

 

 

 

내 여행 수첩 맨 앞장에 적어 가지고 다닌 시다.
이 부적 같은 시 이전에 내 여행 수첩에는 알베르 카뮈가 한 말이 적혀 있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철학인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

 

 

이 시는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레이먼드 카버(1938~1988)가
폐암으로 투병하며 쓴 시들을 모아 사후에 출간한 시집 <폭포로 가는 새 길>에 실려 있다.

제목의 '조각 글(fragment)' 혹은 '편린'이라 함은
한 편의 시가 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미완의 시를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전체 시 중에서 나머지 부분은 소실되고 이 부분만 남은 것일 수도 있다.

누구의 인생이든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 미완의 생에 완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사랑'이다.
또한 전체 인생 중에서 다른 것은 다 사라져도 우리 가슴에 남는 '한 조각의 비늘(편린)'은 사랑이다.

 

 

열아홉 살에 열여섯 살의 소녀와 결혼해 스물한 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카버는
갑자기 밀려든 생활의 무게에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짓눌렸다.

 

생계를 위해 병원 수위, 도서관 사서, 서점 직원, 제재소 일꾼,
화장실 청소부 등 온갖 뜨내기 직업을 전전하며 전쟁을 치렀으며, 더 큰 전쟁은 아내와의 끝없는 싸움이었다.

실업수당으로도 살고 두 번이나 파산했다.
그리고 이때 술과 글을 동시에 시작했다.
인생은 출구 없는 감옥이었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알코올 중독 전업 작가'가 되어 있었다.
20년에 걸친 알코올 중독으로 세 번이나 사경을 해맸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글쓰기는 살아남기 그 자체였다.
글을 쓸 장소가 없어 차고에서 쓰거나 병원 수위실에서 밤새워 가며 썼다.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40세에 술을 끊었으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단편소설 작가가 되었다.
이후 10년이 인생에서 맑은 정신을 갖고 산 유일한 시간이었다.
50세에 카버는 폐암 선고를 받고, 수년간 사랑하던 시인 테스 갤러거와 결혼식을 치른 후,
그녀 곁에서 평온히 생을 마쳤다.

 

 

인생을 시작하면서부터 파산자가 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희망은 늘 조롱당하고,
어떤 손에 의해 생매장당한 기분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카버는 자신이 이번 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한다.

비록 인생은 글쓰기와 달라 처음으로 돌아가 고쳐 쓸 수 없지만,
고통과 굴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못 산 것이 아니라고.

 

 

놀랍지 않은가.
그토록 이른 나이에,
그리고 비로소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고 더 많은 대작을 남길 시기에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카버는 자신이 이 생에서 원했던 것은
위대한 작품을 남기거나 불멸의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지구 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20세기 스페인의 가장 사랑받은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도 자신은
'사랑받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했다.

 

어디 글 쓰는 일만인가.
성공을 원하든,
부자가 되기를 원하든,
유명해지기를 원하든,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사랑받기 위해서다.

따라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을 이루든 인생에서는 실패한 것이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
우리 모두가 원하고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것이
사랑받는 사람이라 불리고 느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럼에도 너는 이 생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얻었는가?'

 

시 속의 질문자는 친구일 수도 있고,
임종을 지킨 테스일 수도 있으며,
처음 만난 독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시인 자신이 병상에 누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인지도 모른다
따뜻하면서도 형형한 눈빛을 지닌 카버가 내 앞에 앉아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자신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로 카버를 꼽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버에 대해

 

"한 번밖에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 단 한 번의 만남이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깊은 온기를 남겼다."라고 썼다

 

하루키는 일본 방문을 앞두고 카버가 죽자 일본어판 카버 전집 출간을 결심했다.
그리고 14년에 걸쳐 카버의 전 작품을 직접 번역해 완간했다.
정말 사랑받은 사람이었다.

 

카버의 묘비에 적힌 이 시는
다시 사랑받기 위해 분투하는 한 인간을 다룬 영화  <버드맨>의 도입부에도 소개되었다.
영화에 나오는 연극 작품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도 카버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내가 이 생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나는 얻었는가?  

 

- 류시화 -   - p69 -

 


류시화 , 루이즈 글릭  / 마음챙김의 시
수오서재 / 2020.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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