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권 - 『현대시학』 (2011년 5월호)
덕배는 파도 위에서 한다 / 박형권
나이 오십 바라보니 세상에 꽉 찬 것들도
다 헐렁해 보이기 시작하고
또 세상의 보드라운 것들이 나 잡수시오 하고 다가와도 가슴 벌렁거리지 않는데
쌍끌이 기선망처럼 밀어주고 당긴
네 살 터울 마누라는
늦여름 모자반처럼 부쩍 감겨온다
덕배는
어제와 다름없이 일 톤짜리 조각배에
마누라를 태우고 달맞이꽃 살포시 오므린 밤에 기름 한 드럼을 채워 넣었다
덕배를 힘껏 짝사랑하던 머큐리 엔진도
우당탕탕 내질러야 할 터인데 이제는 삐걱삐걱 수조기 우는 소리를 낸다
이런 날에는 노래미 볼락들이 심해를 견디기 지루하여 물가로 밀려와
뻐끔뻐끔 담배 피듯 플랑크톤을 흡입하는데 별빛과 검은 밤에 취하여 해롱거리는데
뜰채로 걷어 올려도
사내 몸 끌어당기는 첫 밤처럼 다소곳하다
일하듯 놀듯 물칸* 가득 활어를 싣고 보니
큰놈 등록금 머잖아 맞추겠다 싶어 마음이 널찍해지고
고요하고 적적한 바다가 뽀얀 인광을 뿌리며 배의 겨드랑이를 핥는다
바다가 까닭 없이 반딧불이 꽁지처럼 환해지는 밤
마누라가 이 지점이다 싶은지
홍어냄새로 발효하여 덕배의 살점을 포옥 쓸어 쥔다
물그림자 황홀하고 별빛 초롱하다
아직 바다는 전복같이 납작하거나 개불같이 길쭉하다
바다의 凹凸이 새 바다를 낳나니 오목 하나 볼록하나 따로 남지 않는
그런 무탈한 세상 올 것만 같은 밤
덕배가 그거 한다
*물칸: 배의 갑판 아래 바닷물을 담아 두는 곳, 활어를 보관한다.
※ 이 글은 < 현대시학 2011. 5월호 >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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