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타임스 - 2016. 05. 12」
“자리에 앉기가 싫었습니다. 정말 싫었습니다. 두 시간쯤 더 서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 즐거웠거든요.” 이 말은 포르노 잡지의 대명사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플린트의 변호사 아이작맨이 연방대법원의 구두변론이 끝난 후 그때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아이작맨이 감정에 취해서 한 이 말 속에는 설렘이 있다. ‘세상을 바꾼 법정’에서 허슬러가 수정헌법 1조를 지키고자 투쟁하는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인데, 그중 아이작맨의 연방대법원 구두변론은 가장 감동스럽다.
이 책은 세상을 바꿨던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표적인 판결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소송의 전 과정이 서술되어있다.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했던 카랜 앤 퀸란 사건, 비록 승소하지는 못했지만,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노력했던 수잔.B.앤서니 사건,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허슬러의 래리플린트 사건 등 당시 주목받았던 판결들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였고,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사건 당사자가 어떤 인물인지, 당시 사회적 배경이 어떠했고, 이 사건의 발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사실관계를 서술하고, 이어 소송을 진행하였던 변호사가 누구고, 어떤 전략으로 소송을 진행하였는지, 그에 따라 1심법원과 항소법원, 연방대법원의 판단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소송 전 과정을 긴장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유명한 구두변론은 마치 법정 녹취록을 들여다보는 마냥 대화형식으로 옮겨놓았는데, 그중 절정은 미국 변호사로서도 평생 한 번 경험하기 힘들다는 연방대법관과의 격론이다.
사법연수원 시절 미국 연수 중에 기회가 닿아 연방대법원의 구두변론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9명의 대법관이 방청석을 마주하여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아있고, 대법관 앞 정중앙에 증인석처럼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서 변호사가 홀로 변론을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연방대법관들은 편한 자세로 변호사의 구두변론을 지켜보고, 발언권을 구함 없이 변호사의 변론 중간에 궁금한 사항을 자유롭게 질문하곤 하였다.
이는 흡사 소송이라기보다는 청문회나 국정 토론 느낌이 강했다. 9명의 꼬장꼬장한 대법관을 설득하려면 확신에 가까운 주장정리와 논거가 필요할 것이다. ‘보스턴 리걸’이라는 법정드라마의 주인공 앨런쇼어가 연방대법원 법정에 서는 일에 대하여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최근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전 대법관은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판결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세상을 바꾼 법정’이 미국사회를 변화시킨 판결을 모아놓은 것이라면,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킨 판결을 모아놓은 것으로, 비교해서 읽으면 상당히 재미있다.
존엄사가 인정되었다는 측면에서 카랜 앤 퀸란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은 유사하다. 그러나 허슬러의 래리플린트가 기독교근본주의자 폴웰목사를 광고 패러디에 악의적으로 등장시켜 손해배상 책임을 질 뻔했다가 연방대법원이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손해배상책임을 부정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 대법원은 명예훼손 글을 방치하였던 인터넷포털 사이트 회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물론 폴웰목사는 공인이었고, 우리나라의 피해자는 일반인이었기 때문에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으나,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시각 차이가 느껴진다. 두 나라의 대법관이 어떤 것을 중시하였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각각 판결을 내려졌는지 비교해 보는 것은 2권의 책을 읽는 묘미가 될 것이다.
글 - 오민주(법무법인 온누리 변호사)
안산타임스 - 2016.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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