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 눈 오는 밤」
눈 오는 밤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고 개울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
배는 고프고 목은 타는데 눈보라는 또 휘몰아친다.
나는 왜 또 이 산 속으로 왔나 물통은 또 어디에 있나.
도끼로 짱짱 얼음장을 깨면 퍼들껑 멧새 한 마리.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는데 나한테는 반야(般若)가 없다.
없는 반야(般若)가 올 리 없으니 번뇌(煩惱)를 나눌 동무도 없다.
산속으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평안도(平安道) 시인(詩人)은 말했지만 내겐 버릴 세상도 없다.
한번도 정식으로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그립다. 사람들이 보고 싶다.
배고픈 것보다 무서운 건 외로움이고 외로움보다 무서운 건 그리움이다.
몀불(念佛)처럼 서러워서 나는 또 하늘을 본다. 눈이 내린다. -
- 김성동
이 시는 소설가 김성동 선생이 강원도 진부에 살 때에 쓴 시이다. 선생이 서울에 다니러 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왔더니
그만 물이 꽝꽝 얼어붙어 버렸더라고 한다. 그래 도끼로 꽝꽝 얼음장을 깨고 개울물을 길어 오며 그때의 절박한 소회를
가슴 절절히 살려 쓴 시이다. 이 시를 보고 있노라면 ‘상황이 문학적 미학을 만든다’는 루카치의 말이 절로 실감된다.
산새들이나 말동무하고 토끼, 노루나 이웃할 강원도 진부 산골 외딴 오두막에서 적막히 혼자 살다가 모처럼 인간천지,
문명천지인 서울로 나들이를 나와 2박 3일 주야장창 즐겁고 피로한 통음 끝에 사흘 만에 천지간을 삼킬 듯 쏟아지는 눈
보라 속을 뚫고 보금자리라고 찾아들었더니 그동안 사람 떠난 자리였다고 강원도 칼바람 추위에 개울물이 꽝꽝 얼어붙
어 버린 거라. 말이니까 쉽고 안 당해 봤으니 허허, 어처구니없는 웃음이라도 나지 당하는 당사자는 얼마나 비감하고 난
감했겠는가. 눈은 저리 펄펄 날리는데, 도끼로 얼음장을 꽝꽝 두들겨 깨지 않고선 문명을 등지고 사는 오지 속에서 숙취
는 고사하고 갈증을 달래줄 물 한 바가지 얻을 수 없는 상황. 등지고 살던 문명세계에서의 2박 3일 통음 끝에 육신이 멀
쩡하겠는가, 정신이 멀쩡하겠는가, 그렇다고 기다려주는 반야가 있어 허! 깨비처럼 허물어지는 고단한 심신을 받아주겠
는가, 어디 기댈 데도 없고 기댈 수도 없고 죽으나 사나 도리 없이 ‘오로지 나만이’ 원시적 도끼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
는 상황. 그런데 하늘도 무심치, 어쩌자고 눈은 저리도 휘몰아치는지.
시인이라고 어찌 그 외딴 산 속에 문명도 등지고 말벗도 없이 절대고독 속에서 외롭고 쓸쓸히 살고 싶었겠는가. 시인이
처한 비승비속(非僧非俗)도 아닌 마지못한 상황이 시인을 귀양 보내듯 소외시켰고 시인 또한 자발적 소외를 감행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진실로 내가 기다리는 게 무엇인가, 새벽부터 새벽까지, 내가 혼을 기울여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
이란 말인가, 깨달음의 세계인가, 관음보살의 미소인가, 영육을 던져 한 자루의 뼈로 합쳐질 수 있는 완전한 여인인가,
혼의 문학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도 멀고 아득해서 슬프고 눈물이 나고 눈물의 끝에 그리움이 홍수 지고 그리움의 끝에 눈물이
홍수 지는 생활. 평생 그리움을 좇아 안락함을 마다하고 비처럼 듣다 긋다 바람처럼 일다 스다 저녁놀처럼 붉다 거멓다
떠돌았으나 진정한 자유가 깃든 형식을 마다한 적은 없었지만 여전한 외로움, 외로움보다 더 깊은 내상, 그리움. 그러니
시인은 세상이 그립고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작년 여름 모진 장맛비 폭우를 뚫고 시인의 비사난야(非寺蘭若)를 찾아갔다가 시인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낭
독해주는 이 시를 들으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나 또한 시인처럼 고단하고 적막한 몸과 마음에, 기다
려 줄 반야도 없고, 찾아와 줄 반야도 없으니 번뇌를 나눌 동무도 없고, 오롯이 적막강산에서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
서, 딸아이의 엄마로서,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살고 있는데, 내 안팎의 모든 것들, 하다못해 쓰
레기 하나 버리는 것도 내 손을 거쳐야만 버려지는 날들이어서 생의 끊임없는 시비 속에 심장에 타격을 입고 쓰러지기
까지 ‘그만하면 더할 나위 없는 생의 절정’을 맛보고 있는 터였다.
모름지기 시란, 시심과 시정신이 없이, 시에 대한 외경심, 순결성, 염결성 없이 거짓으로 지어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시, 하면 눈물이 나고 시인, 하면 눈물이 나야 하며 시 한편을 보고 나서 벅차오르는 감동에 밥을 안 먹
어도 배가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처에 난무하는, ‘대가리’로 쓴, 매너리즘과 에코파시즘에 빠진 도색화된 생태주의
시들, 생명상업주의 시들, 생명파시즘적인 시들을 보다가, 시가 뭐 그렇게 어려워야 하는가, 대체 어려울 게 뭔가, 그야
말로 정직한 이 시를 보며, 시는 모름지기 이런 시심을 가져야 한다는 기쁨에 감동 깊었다.
글쓴이 - 김지우
(소설가) 2000년 창비 신인소설상 수상. 소설집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가 없다』가 있다.
[t-14.03.09. 20210305-1543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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