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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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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정만의 독백이 들리는듯 하다.

by 탄천의 책사랑 2012. 5. 20.

 

 

슬픈 일만 나에게 

사랑이여,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바람도 조금 불고
하얀 대추꽃도 맘대로 떨어져서
이제는 그리운 꽃바람으로 定處(정처)를 정해다오.

세상에 무슨 수로
열매도 맺고 저승꽃으로 어우러져
서러운 한 세상을 건너다 볼 것인가.

오기로는 살지 말자.
봄이 오면 봄이 오는대로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는대로
새 울고 꽃 피는 역사도 보고
한겨울 新雪(신설)이 내리는 골목길도 보자.

참으로 두려웠다.
육신이 없는 마음으로 하늘도 보며
그 하늘을 믿었기로 山川(산천)도 보며
산빛깔 하나로 大國(대국)도 보았다.

빌어먹을, 꿈은 아직 살아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역에 자고
그 꿈자리마다 잠만 곤하여
녹두꽃빛으로 세월만 다 저물어 갔다.

사랑이여, 정작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 朴正萬 시집「슬픈 일만 나에게」 중에서

 
時作매모
말한마디 못한 채 떠난 이들을 그리며...
근사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 채 그리운 사람들은 다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남은 것은 육신의 병고뿐이었다.
아니 남은 것이 또 있었다.
허무와 절망과 고통의 멍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순리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 <동아일보 1988 04 16 >


시인은 일기장에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박정만> 시인처럼은 아니라도 그런 시인은 있었다.
<천상병>의「귀천」처럼, 아니면 <기형도> 시인의 「빈집」은 어떤가.
더 한다면 <한아운>의「파랑새」도 있을 것이다. 
43세로 세상을 등진 시인은 자신의 심정을 유서처럼 글로 남겼다.

  나는 겨우 술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몸은 거의 완벽한 탈진 상태였고,
  정신은 기화하는 액체와도 같이 제풀에 풀어져 흐물거렸다.
  새삼 사는 일이 눈물겹게 생각되었지만,
  일어나기는 고사하고 이제 자살조차 꿈꿀 힘이 내게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마침내 내 손이 나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온 몸이 불같이 뜨꺼워지더니 때 없이 구토가 나고 방안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난마처럼 얼크러져서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그 많은 생각들을 하는 데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원고지를 앞에 놓고 펜대를 잡았다.
  그리하여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따라
  머릿속에 들끊는 시어의 화젓가락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 편을 쓰고 나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 <박정만>「그 처절했던 고통의 시간들」중에서 - 

 
2008 12월을 몇일 앞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시인은  
마흔셋의 삶과 죽음을 時語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피할 수 없는 죽음앞에서 살고 싶은 간절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대청에 누워

나 이세상에 있을 땐 한간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차피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은 하널은
뒤엉 속의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박정만> 시인의 時語은 아름답다
그래서...
애절하고 슬프게
긴 울림으로 가슴에 여울진 파장이 인다.

빌어먹을, 꿈은 아직 살아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역에 자고
그 꿈자리마다 잠만 곤하여
녹두꽃빛으로 세월만 다 저물어 갔다.라는 시인의 독백이 들리는 듯하다.

 

[t-12.05.20.  20220526-150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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