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영 - 애첩기질 본첩기질」
[230314-155024]
아, 쌓인다 쌓여!
방송은 어찌보면 철저한 기氣 싸움이기 때문에, 매일 두 시간의 생방송을 마치고 나면 탈진할 때가 많다.
청취자들과의 심리전으로도 볼 수 있는 채널경쟁은,
다른 데로 돌리고 싶어하는 청취자들과 그들을 고정시키려는 진행자 사이에 자극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7부터 9시까지 <FM 대행진>이 끝나면,
부랴부랴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kBS 제 2라디오 <새벽을 열며>라는 프로를 녹음한다.
그 녹음이 끝나고 점심시간부터가, 쌓였던 긴장과 피곤을 풀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이렇게 극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생방송의 반복,
그리고 아나운서실의 일요근무까지 겹치는 주일은 정말 <쌓인다 쌓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잠시도 한눈 팔 수 없는 경쟁사회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중한 스트레스와 권태로움으로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풀어주는 방법도 개인에 따라 여러가지겠지만,
내 경우에는 몹시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리거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의 상태를 전환시킨다.
둘려싸고 있는 현실이 못 견디게 권태로울 떄,
나는 쇼팽의 녹턴이나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그가 한때 조르주 쌍드와 도피행각을 벌였던 지중해상의 마요르카Mallorca 섬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마술처럼,
일상의 찌꺼기나 지리함이 물러가고,
에머랄드빛 파도와,
눈부신 태양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다.
이 상상요법은 좀더 구체적인 연상을 요하기 때문에,
그렇 때 나는 나의 상념이 흐르는 대로 기분좋게 몸을 맡기고,
책에서 읽었던 그곳의 경치와 두 사람의 은거생활을 마음 내키는대로 전개시켜 본다.
1838년,
쇼팽이 병든 몸을 이끌고,
연인 조르주 쌍드와 함께 요양와 한겨울을 아무도 모르게 지낸 곳이
바로 마요르카섬의 산골마을 <발데모사>에 있는 <까르뚜하> 수도원이라고 한다.
불현듯 악상이 떠올라,
정열적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쇼팽 옆에서 조르주 쌍드는 조용히 집필을 했겠지?
실제로 그 당시 쇼팽은 <녹턴 24번 서곡>을 그곳에서 작곡했고,
쌍드는 후에 <마요르카의 겨울>을 썼다고 한다.
그러다 싫증나면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오랜지가 익어가고 있는 초지를 지나 지중해의 물살이 발목을 간지럽히는 해변까지 산책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어린애처럼 장난도 치며 저녁에 수도원 별체로 돌아왔을 때는
몸이 약한 쇼팽을 위해 조르주 쌍드가 특별한 건강식을 만들었을는지도 모른다.
새벽미사를 알리는 종소리에 잠이 깬 두 사람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아침 햇살과 함께
온몸으로 퍼지는 나른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서로를 다시 확인하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그 마요르카 섬을 찾아,
<까르뚜하> 수도원에 있는 쇼팽이 직접 사용했던 피아노와 자필악보를 봐야지'
하는 꿈은 나를 언제나 설레게 만든다.
수도원을 들러보고 나서는 바람이 맛있게 불어오는 해변 레스토랑을 찾을 것이다.
거기에서 캐비어를 곁들인 야채 샐러드와 함께,
비노(포도주) 한 잔을 곁들이면 알딸딸한 기분이 그만일 것이다.
조금 비쌀 테지만 바닷가재를 시켜 식도락가인양 폼을 잡아도 좋겠고,
조개와 홍합에 마카로니를 곁들인 지중해풍의 수프를 맛보는 것도, 여행의 운치를 돋우어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배부른,
있는 자들의 상상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어디다 좀 덜쓰고,
어디다 좀더 투자하냐는 것일 게다.
경험이나 여행 등
무형의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평소에 아껴 모은 돈으로 적금이라도 부어,
몇년을 고대하고 계획한 끝에 세계여행을 갔다올 수도 있는 문제다.
다군다나 몇년 후 GNP가 지금의 두배인 8~9천쯤 되고,
값싼 여행상품이 훨씬 다양하게 개발된다면 더더욱 사치스런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마음 속에 이렇게 가고 싶은 곳 하나를 상상하고 간직하며 산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무언가가 가슴 속에 답답하게 쌓였을 때는 두말할 필요가 없고.......,
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신경이 유난히 날카로워지고,
초조해질 때는 첼로연주를 듣는 것도 마음을 사뭇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소파에 쓰러지듯이 누워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첼로의 부드럽게 위무하는 듯한 음색을 즐기는 것이다.
위무慰撫 - 불행한 사람이나 수고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어서 달램
첼로곡에도 수많은 레파토리가 있지만,
참고로 다음 연주자들이 켜내는 이런 음악들을 듣고나면 아우성치던 마음이 훨씬 가라 않을 것이다.
*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 로스트로포비치 혹은 미샤마이스키의 연주로.
* 엘가의 첼로협주곡 E 단조, op. 85
---- 이 곡은 자크린느 뒤푸레Jacqueline Du Pre 의 연주가 일품이다.
* 브람스의 첼로소나타 제 2번, op. 99
---- 이 곡도 역시 자크린느 뒤 푸레의 연주로 권하고 싶다.
* 드브르작의 첼로협주곡 op. 104
---- 로스트로포비치의 것으로
* 랄토의 첼로협주곡 D 단조
---- 유쾌하게 생긴 요요마의 연주가 신선하다.
* 보케리니의 첼로협주곡
---- 자끌린느 뒤 푸레의 연주로
---- 아니면, 베를린 필하모니의 12명의 첼로주자들의 연주로 비틀즈의 명곡들을 들어도 좋을 것이다.
정신을 안정시키는 데 효과적인 이 첼로 감상요법은 특히 여름보다는 가울과 겨을에 운치가 있다.
첼로의 낮게 흐느끼는 듯한 저음은 슬픔을 더욱 슬픔답게 만들어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러나 쌓인 것을 푸는 데 수천수만 가지 방법이 있다해도,
그 방법의 선택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개성에 달린 것이다.
얼마나 적은 돈과 시간을 들여,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가 하는 경제원칙이 적용될 수는 있어도 말이다. (p53)
※ 이 글은 <애첩기질 본첩기질>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숙영 - 애첩기질 본첩기질
문학사상사 - 1990.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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