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 2008. 03.15. Bravo! My life」
갓 결혼한 사내의 막막함을 누가 알까.
앞을 보고 달리는 것 외엔 달리 길이 없다.
직장생활 십 몇년에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그러나 남은 것은 회식자리에서 부하직원들에게 들려줄 후일담밖에 없었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래형으로 말한 적이 언제였던가'.'비전'이라는 단어마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김연신 한국선박운용 사장(56)은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고 다닐 정도로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지만 일상에 치여 시를 잊고 있었다.
그날 택시 안에서의 '대오각성' 이후
그는 더 늦기 전에 시를 다시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마흔 두 살에 늦깎이 시인이 됐다.
그리고 '시인,시인들' '시인의 바깥에서' '시를 쓰기 위하여'(문학과지성사) 등 시집도 세 권이나 펴냈다.
시는 그의 미래를 비춰준 '마음의 스승'이다.
'시인 CEO' 외에 그의 남다른 면은 또 있다.
김 사장을 처음 만난 곳은 회사의 집무실도, 시를 쓰는 서재도 아닌 서울 종로의 YMCA유도장이었다.
오전 7시 여기저기서 들리는 기합소리 속에서 그는 연습에 골몰하고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유도장 앞으로 그를 태우러 온 고급 승용차가 보이자
비로소 그가 1조5000억원 규모의 선박펀드자금을 운용하는 회사 CEO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하지만 시와 유도, CEO라는 세 단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이에 대해 '변화'라는 대답을 내놨다.
생활에 매몰돼 별다른 '미래' 없이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중 변화를 위해 시를 썼고,
시 쓰기가 농익자 문체의 변화를 위해 유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 시도 지루해지더군요.
시를 바꾸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예 말에서 떠나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2005년부터 유도를 시작한 그의 실력은 공인 2단.
지난해 10월에는 서울시 유도대회 37세 이상 장년부에서 '장정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그러나 세 개의 이질적인 분야를 오가는 '모드 전환'은 쉽지 않을 듯했다.
시 쓰기의 감수성과 CEO의 냉철한 판단이 상충되는 건 아닐까.
그는 “오히려 그런 감수성이 지금의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고 말했다.
그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곳은 대우중공업(현 대우조선해양).
말이 회사원이지 결국 하는 일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배를 파는 장사꾼이었다.
김 사장이 말하는
장사꾼의 가장 큰 덕목은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 잘 듣는 기술이다.
“상대방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간파해야합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예민한 감수성이지요.
상대방의 말투와 몸짓, 눈빛 하나에서 의중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하니까요.”
고속도로의 뻥튀기 장수나 지하철역 입구의 김밥장수도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짚어내는 ‘감수성’으로 장사하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대우중공업에 입사한 뒤 이사로 승진할 때까지 한번도 진급에서 누락된 적이 없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2003년 설립된 한국선박운용의 첫 CEO로 취임한 뒤 연간 1인당 1억원의 순이익을 낼 만큼 회사도 키워놨다.
지금까지 선보인 선박펀드만 35개.
국내 최초로 해양경찰청의 경비함정 건조 사업을 금융지원하고 고수익 간접투자상품을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CEO에게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 이상의 덕목이 필요했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면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도는 그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몸 스승’이다.
“유도는 남을 쓰러뜨리기 전에 내 몸의 중심을 먼저 잡은 다음 상대방의 균형을 흐트려놓는 운동입니다.
남을 넘어뜨리려는 마음보다 내가 먼저 바로 서야 이길 수 있습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접어들자 그는 은근슬쩍 자신의 시집을 꺼내 보이며 “혹시 사인이 필요하진 않냐”고 물었다.
이왕 사인을 해주는 김에 직접 쓴 시도 한 구절 적어달라고 했다.
그는 1분여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딱 두 문장을 적어줬다.
‘기다려 보자고 나는 대답한다.
좋은 날들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흰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부분)
박신영 기자
허문찬 기자
출처 -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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