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의 노래 - 노천명 / 文志社 1988. 03. 30.
뒤는 산이 둘려 있고 앞엔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여기서 윤선을 타면 진남포로, 평양으로 간다고 했다.
해변에는 갈밭이 있어 사람의 키보다도 더 큰 갈대들이 우거지고
그 위엔 낭떠러지 험한 절벽이 깎은 듯이 서 있었다.
앞에는 퍼어런 물이 있는데
여름이면 이곳 큰 애기들은 갈밭을 헤치고 이 물을 찾아와 멱을 감았다.
- 향토 유정기 에서.
사 슴
모가지가 길어서 슰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나의 二十代
인생의 여축 餘蓄이 많았던 20대에 있어서 청춘의 그 다이아몬드 같은 금세를 내가 알았을 리 없고,
여기에서 내 20대는 괜히 묵혀져 버렸던 것이다.
하기야 화려한 서장 序章이었다.
그때 이 나라엔 하나밖에 없었던 여자 최고 학부를 나오자 모 신문사에서 금방 데려갔고,
여기서 일을 하는 한편 나는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토하듯이 쉴 새 없이 시를 토했으며,
또 용정 龍井이니 북간도 北間島니 이두구 二頭構니 연길 延吉 등지를 한 바퀴 여행하고 와서는
<산호림 珊瑚林>이라는 처녀 시집을 내놓았다.
지금은 흔적조차도 없어진 남산동의 그 호화스런 경성 호텔에서 정초에 출핀 기념회를 받던 기억,
당시 나는 진달래빛으로 아래위를 입고 나타났는데,
고 김상용 金尙鎔 선생을 위시해 미세스 매이너 등 모두 박수들을 해서
내 입장을 화려하게 해 주던 일은 더구나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내 눈은 머언 데로,
높은 데로만 주어졌고 눈앞에 있는 것들은 웬일인지 마땅치가 않았다.
내 일생의 병고는 진실로 여기서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20대의 내 정열은 시작 詩作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이화 시절부터 취미가 있던 연극을 또 하게 되었으니,
당시 인사동 태화여자관 泰和女子館 안에 있던 '극예술 연구회'에 들어 가지고
고 함대훈 咸大勳, 이헌구 李軒求, 서항석 徐恒錫, 조희순 曺喜淳, 이시웅 李時雄, 모윤숙 毛允淑,
최영수 崔永秀, 고 김복진 金福鎭, 최봉칙 崔鳳則, 신태선 申泰善, 제 씨랑 밤마다 극연구회관에
모여서는 고단한 줄도 몰랐다.
안톤 체호프 작 作의 <앵화원 櫻花園>에서 모윤숙씨는 라네프스까야 부인으로 분장을 하고,
나는 그의 딸 아아냐로 분장을 하고,
부민관 府民館은 이작 날 생각도 안 했을 무렵,
공회당에서 입추의 여지도 없는 관중을 상대로 열연을 한 적도 있다.
이 연극에서 이헌구씨가 대학생으로 분장을 하고 나의 상대역이 되었는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원 스텝도 떼어 놓을 줄을 모르는
대학생 (이헌구씨)이 자꾸만 무대에서 내 발등을 밟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게 된다.
그 시절에 나는 트로트 정도는 출 줄 알았었는데,
일본까지 갔다 오신 그 양반은 춤을 출 줄 몰라서 사람들을 웃겼던 것이다.
그때 연출을 맡아보시던 홍해성 洪海星 선생의 무지무지한 신경질을 받다 못해
나는 가끔 맡은 배역을 안 하겠다고 성을 내고 나오려고 하면
번번이 지금은 가 버린 함대훈 씨가 오라버니모양 나를 얼려 주어서 도로 앉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연극을 하면서도 무언지 모르는 채 정열에 둥둥 떠서 다녔으나,
이 묘령의 처녀는 여기서 이성들하고는 얌전히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진짜 사건은 <앵화원>을 공화당에서 며칠 동안 상연할 때 여기의 관객으로 왔던 모 교수가
내 러브 어페어를 일으켜 주게 되었던 것은 무슨 운명적인 일이었는지 모른다.
연애를 하는데 실로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알아듣지 못할 대목이 많다.
가슴은 늘 와들와들 떨렸고,
한번도 우리는 어디를 뻐젓이 못 다녀 봤던 것이다.
어쨰 연애를 하는 사람에게는 천지가 그렇게 좁으며 아는 사람도 그렇게 처처에 널려 있는 것인지,
이렇게 와들와들 떠는 마음,
결국은 이런 마음이 내 첫사랑을 보기 좋게 날려 보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용감무쌍했어야 할 이 20대에 있어서 나는 어리석고 약했었다.
응당 화려했어야 할 20대를 정말로 나는 무색하게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쯤 20대가 다시 와 준대도 나는 여전히 와들와들 떨기만 할 것 같다.
세상이야 뭐라든...... 이것이 (이하 없어졌음)
노천명 - 1912년 09. 02. / 1957년 06.16.(향년 44세),
학력 -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문화 정보 > 독서정보(기고.대담.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해설 -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성복) (0) | 2009.11.09 |
---|---|
그들은 왜 책을 읽는가 - 장석주·이현우·정혜윤 3人3色 독서론 (0) | 2009.08.27 |
위편삼절 韋編三絶 (0) | 2008.07.17 |
국민이라는 괴물 - 사람을 '국민'으로 만들지 마라 (0) | 2007.10.18 |
나는 그의 아내이다 (0) | 2007.07.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