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미 -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현재 우리에게 황태자니 황태자 비니 하는 말은 어쩐지 먼 나라 이야기 거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불과 90여 년 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엄연히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존재하였다.
그들은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황제와 황후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나라의 패망은 백성들을 나락의 길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황실과 황태자 부부의 운명마저도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특히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의 삶은 참으로 기구하다.
그녀는 망한 나라 조선의 황태자비였으면서, 정작 조선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선을 망하게 한 나라인 일본의 황족이었다.
천황비를 꿈꾸던 소녀
이방자(1901~1989)의 본명은 나시모토 마사코이다.
아버지는 메이지(明治) 천황의 조카로서 나시모토미야(梨本宮家) 가문의 모리마시 친왕(親王)이었고
어머니는 큐슈 지방의 유력한 번주의 딸이었다.
마사코가 태어난 집안은 일본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최고의 가문인 셈이다.
마사코는 그런 황족 가문에서 귀족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행복한 소녀 기를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당시 황태자이던 히로히토(소화천황)와의 혼담이 오가기 시작한다.
마사코가 일본 황태자비 후보자 3명 중에 한 명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미인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미모와 일본 최고의 황족 가문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마사코는 일본 황태자의 아내, 즉 미래의 천황비의 자리를 꿈꾸는 소녀였다.
식민지 조선의 황태자비가 되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황태자 간택에 앞서 3명의 후보들에게는 여러 가지 시험이 따랐다.
후보들의 관상을 보고 또 건강검진을 하는 것도 그 시험의 일부였다.
시험 결과 마사코는 후손을 낳을 수 없는 관상이라는 판명이 났다.
게다가 의학적으로도 불임의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소견이 따랐다.
후일 회고에 의하면 이는 마사코 외의 후보였던 다른 두 규수의 배경이던 군벌이 꾸민 흉계였다고 한다.
어쨌든 불임으로 진단이 내려 진 마사코는 천황비 후보에서 재외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또 다른 음모가 꾸며졌다. 마사코와 조선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의 결혼이 추진된 것이다.
일본은 명문 황족의 딸을 조선 황태자와 결혼시킨다는 전시적인 효과와 더불어
아이를 갖지 못하는 그녀와 영친왕을 결혼시켜 조선 왕조의 대를 끊어놓자는 흉계를 꾸몄다.
이리하여 나시모토 마사코와 조선의 영친왕 이은은 국제적인 정략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식민지 조선의 황태자와의 결혼으로 천진난만하던 일본 황족 소녀 마사코는 이방자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된다.
영욕의 세월
이은과 결혼 후 이방자의 삶은 개인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영욕의 세월이었다.
망국의 황태자와 결혼한 이방자는 결혼 내내 이은의 울분을 함께 나누어야만 했다.
그녀는 친정인 일본의 편을 들 수도,
시집인 조선의 편을 들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에 서서
그저 영친왕과 그의 나라가 탄압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기만 해야 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에게 아이가 생겼다.
그녀가 처녀시절 받은 진단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혹은 남편의 불행을 보면서 후손을 낳아야겠다는 열망이 강렬한 탓이었는지
그녀에게서 영친왕의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낳은 아이는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은 애초에 조선 황실의 대를 끊어 놓겠다는 음모가 성공하지 못한 탓에 영왕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조선 황실은 원수 같은 일본의 피가 섞인 아이를 마냥 환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영친왕의 아들 이구는 일본도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이후 오랫동안 해외에서 망명객처럼 유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영친왕 부부에게 닥친 또 다른 불행은 조선의 독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맞이하였지만 한반도에 새로 생긴 정부는 황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정권유지를 위해 영친왕 부부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영친왕 부부는 일본에서 더 이상 왕족으로 대접받지 못한 채 재일 한국인으로 분류되었다.
영친왕 부부는 국적도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963년, 영친왕 부부에게 귀국이 허락된다.
그러나 다시 조국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영친왕 이은은 이미 쓰러져 기억 상실증과 실어증에 시달리며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7여 년간 병마와 싸우다가 마침내 1970년 숨을 거두고 만다.
낙선재로 돌아와 사회복지 사업에 힘을 쏟다
생면부지 한국 땅에 마지막 황태자비란 이름만 짊어진 채 육순의 할머니 이방자는 홀로 남았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1968년 정부의 마지못한 배려로 들어가게 된 창덕궁 낙선재에서 마지막 남은 생을 마칠 것을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일본 황족의 딸이 아니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자신을 세웠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조선 황실을 제대로 대접하지주지 않았다.
이방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위로는 순정효황후(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를 모시고,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또 한 명의 망국의 희생자이자 시누이인 덕혜옹주를 돌보면서 낙선재에 끝까지 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못다한 꿈인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한다.
이때 이방자가 시작한 사회사업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사업의 기틀을 닦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방자는 사회의 어둡고 어려운 곳이라면 거침없이 손길을 뻗었다.
영친왕 기념사업회, 자혜학교, 명혜학교 등의 설립은 특히 장애자 재활의 길을 여는 방편이었다.
그녀가 직접 칠보공예사업을 벌여
장애자들이 스스로 기술을 익혀 사회복지사업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 명휘 학원도 그중 하나이다.
제대로 황태자비의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사회봉사의 신념으로 동분서주하며 남편의 유업을 이어가던 이방자는
한국에 돌아온 지 25여 년이 되는 1989년에 끝내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숨을 거둔다.
나사모토 마사코, 이방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그녀의 삶은 한국과 일본,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근, 현대사를 고스란히 지켜보며 그 속에서 가장 고통받은 희생자의 삶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불운의 삶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위엄과 자존심으로
황태자비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았던 이방자의 삶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게다가 그녀가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의 황태자비로 살고자 했던 만년의 삶은
국적과 핏줄을 넘어 서늘한 경외감마저 느끼게 한다. (p351)
※ 이 글은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김정미 -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눈과마음 - 2005. 08. 25.
'일상 정보 > 사람들(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아일보-‘웹디자인’ 요가 강사, 와인바 차린 회사원/2030세대 ‘N잡’ 확산 (0) | 2022.08.04 |
---|---|
머니투데이-"불필요한 토끼들 한꺼번에 잡아야" (0) | 2022.07.15 |
중앙일보-허준이 '수학은 인간한계 이해하는 과정' (0) | 2022.07.06 |
생각의 겹 -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0) | 2022.06.26 |
장성군민신문-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0) | 2022.06.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