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릴 스트레이드 - 와일드 (반양장)
-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
나는 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 계획을 세우는 몇 개월 동안 나를 밀어붙이는 힘이 되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전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 PCT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줄 터였다.
그곳을 걸으면서 내 인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참이었다.
인생을 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채,
내 의지와 힘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p101)
인생에는 어느 날 갑자기 불청객처럼 찾아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경험은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런 엄청난 상실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면
우리는 그 충격과 슬픔, 절망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한다.
평소에 강인했던 사람이라 해도 마음이 무너지고 삶이 황폐해진다.
어떤 경우에는 상실감이 너무나 큰 나머지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 자신을 방기하고 파괴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실제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존재를 잃고 자신을 내팽개친 채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한 여성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미국의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다.
훗날 그는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를 구원한 자전적 이야기 <와일드>를 썼고,
그 책은 2012년 세상에 나오자마자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에 올라 전 세계 21개국에 출간되었다.
미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화제와 감동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2014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그 뒷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다.
비행기에서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명 받은 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셰릴 스트레이드를 직접 찾아가
영화 제작을 제의했고 결국 주연까지 맡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자신의 전부였던 엄마가 갑작스런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뜨자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로 살던 셰릴이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기 위해 PCT를 걷는 94일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PCT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의 약어로,
캘리포니아 주의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오리건 주를 거쳐 워싱턴 주의 캐나다 국경까지
시에라네바다산맥과 캐스케이드산맥을 따라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도보여행 길이다.
실제 걷는 거리가 4,285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길은 사막에서 시작해 험준한 산과 협곡, 고원과 호수,
그리고 곰, 퓨마, 방울뱀 같은 야생 동물이 사는 숲과 황무지를 통과하는 극한의 공간이다.
그러니 실제로 PCT 완주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극소수지만 여성이 혼자 이 길을 걷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가슴이 쿵 내려앉게 만든다.
비탈진 산길을 걷던 셰릴이 발이 너무 아파 잠시 등산화를 벗고 발을 살펴보는 사이,
옆에 내려놓은 무거운 배낭이 넘어지면서 등산화 한 짝이 길 아래 가파른 숲 속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헉! 몇 날 며칠을 걸어도 사람은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산속에서,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등산화를 잃어버리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고에 충격을 받은 셰릴은 성난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그리고 나머지 등산화 한 짝도 그 아래로 힘껏 던져버린다.
피로 물든 엄지발톱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고, 셰릴은 극심한 고통을 견디며 그것마저 뽑아버린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의 심정도 한없이 괴롭고 막막할 따름이다.
그러나 셰릴은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배낭에서 샌들을 꺼내 신더니 테이프로 신발과 발을 둘둘 감아 고정시킨다.
그리고 자기 몸집보다도 더 큰 무거운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는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영화 속 주인공은 물론 그를 지켜보는 관객마저도 충격과 절망에 빠뜨리는 이 강렬한 첫 장면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운을 남기며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셰릴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지독한 가난 속에서 자랐지만
늘 긍정적이고 따뜻했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 덕분에 바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작가의 꿈을 키우며 대학도 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일찍 결혼도 했다.
그러나 스물을 조금 넘긴 무렵에 자기 삶의 뿌리이자 기둥이었던 엄마를 갑자기 잃게 되자
셰릴의 마음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솟아나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급기야 육체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섹스와 마약에 빠져들면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서 셰릴은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는 딸이었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그때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상점 가판대에서 우연히 본 PCT 안내책자가 계기가 되어
어떤 운명의 힘에 이끌리듯 자신의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이 무모한 여정을 준비한다.
PCT를 걷는 여정에서 셰릴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을 만큼 생존을 위협받는 온갖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과 엄마가 했던 말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방황하고 망가졌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셰릴의 여정을 쭉 따라가는 가운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셰릴이 이 고행을 시작하게 된 이유와,
지난날의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떤 뚜렷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서 떠난 길은 아니었다.
너무 힘들면 언제라도 중간에 그만두자 생각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다.
그러나 거대하고 무심한 자연 속에는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우리의 인생처럼. 온갖 시련이 닥칠 때마다 너무나 두렵고 힘들었다.
하지만 셰릴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길을 갔다.
솔직히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었다.
장엄한 자연 경관에 경이를 느끼는 순간이나 중간 경유지들에서 보내는 잠깐의 달콤한 휴식 시간도 없진 않았지만,
어느새 나도 셰릴과 하나가 되어 그 길고 험난한 PCT를 계속 걸었기 때문이리라.
셰릴의 여정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와,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드디어 끝났구나’라는 안도감이 앞섰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 여정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갈 수 있는 만큼 가보겠다는 의지와 끈기로 목적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셰릴은 황량한 자연 속에서 절대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엄마를 떠나보낸 슬픔과 과거의 상처들을 날 것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누구도 함께하고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만의 애도와 치유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현재의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덮는 일을 그만두고 건강하고 주체적인 자아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후로도 셰릴은 엄마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겠지만
예전처럼 자신을 해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회복 능력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큰 상실을 겪더라도 그 일을 제대로 마주하고 떠나보내면,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은 자연스레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영화를 보면서, 엄마를 잃은 뒤 셰릴이 왜 그토록 극단적인 선택을 이어가며 자신을 망가뜨렸는지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셰릴의 상처와 아픔에는 공감했다.
그리고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셰릴이 자아를 되찾기 위해 왜 굳이 위험천만한 PCT 도보여행을 선택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그 또한 셰릴만의 통과의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셰릴은 다시 과거로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가 아니며,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니까.
셰릴이 도보여행 내내 메고 다니던 ‘몬스터’라는 별명의 거대한 배낭을 보면서
우리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떠올랐다.
또한 셰릴이 걸었던 험난하고도 경이로운 PCT는 우리 앞에 펼쳐진 예측불허의 인생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셰릴은 PCT를 걷는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며 때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나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아 계속 나아갔으며
마침내 자신의 종착지인 ‘신들의 다리’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셰릴은 스스로 슬픔과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와 새로이 자신의 길을 찾아 걸어갈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원작도 궁금하여 책을 찾아 읽었다.
책에서는 영화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셰릴이 직접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면서 또 다른 감동에 젖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영화 제작과 주연을 맡은 리즈 위더스푼과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셰릴 스트레이드의 특별한 교감 덕분인지(실제로 셰릴은 영화촬영 현장에 자주 방문했었다고 한다)
영화와 책이 각각의 매력을 발하면서도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첫머리엔 이런 글귀가 나온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었다.
※ 상기 내용 중 일부는 <맘울림>, 2018년 9월 통권 제43호에 실린 내용을 인용함,
셰릴 스트레이드 - 와일드(반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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