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 곽 재 구 / 문학과지성사 1983
사평역에서
곽 재 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이해와 감상
시의 화자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시
행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여행은 조금은 쓸쓸하고 우울한 편이다.
이 시를 모티브로하여 시인의 친구인 소설가 임철우는 비슷한 제목의 단편을 쓴 바 있는데,
그 소설에서 1인칭의 화자가
수배중인 운동권 대학생이었음을 참고하면 이 시를 재미있게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어쨌든 그가 어두운 분위기의 여행을 하고 있음은,
제 7, 8연의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라는 서정적 표현에 의해 뚜렷이 드러난다.
이 표현은 사실 이 시의 분위기에 주춧돌을 이루는데,
마지막에는 약간 변주되어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조용히 지난 일을 떠올리며 톱밥난로에 톱밥을 던져주는 젊은 남자,
이 장면은 이 시가 이룩한 하나의 서정적 성취의 중심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 우리는 붉게 타오르는 불씨를 삶의 핵심적 정력으로,
그 위에 던져져 작고 아름다운 불꽃으로 연소하는 톱밥을
시간 위에 꽃 피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로 바꿔 읽을 수 있게 된다.
특급열차는 서지 않는 변방의 간이역.
그 역사의 바깥을 채우며 내려 쌓이는 눈.
막차를 기다리는, 삶에 지친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 지펴진 난로.
이와 같은 극적 공간에서 시인은 시적 경구를 생산해 내는데,
그것은 산다는 것은 때론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과연 조용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실체를 느끼게 될 법도 하다.
이 시는 우리에게 혼자만의 여행이 주는 응시의 시간을 환기한다.
설사 그 여행이 강요된 것이며 도피의 몫이라 할지라도.
이 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으로 곽재구 시인의 등단작이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알뜰하게 사람 사는 얘기를 서정적인 필치로 엮어내고 있는 이 시는
1980년대의 한국 서정시가 도달한 한 정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해설 - 이희중
※ 이 글은 < 사평역에서>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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