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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천득,외-대화/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아가리

by 탄천사랑 2023. 3. 6.

「피천득 김재순 법정 최인호 - 대화」

[220302-152540]

 

꿈에 대하여
우암, <시인을 위한 물리학> 덕분에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물리학에 아주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금아, 네, 그래요.
특히 우주에 관심이 많죠.
수천, 수만, 수억의,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많은 성좌가 자리 잡고 있는 우주는 참 기가 막히게 신비한 곳입니다.
더구나 그 어마어마한 우주가 팽창하기까지 한다는 것 아닙니까.
정말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이지요.
맨 처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아주 아주 작은 생명체가 우연한 기회에 빅뱅을 일으켜 생겨났다고 하지요.
종교적으로는 신이 창조했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주의 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우암, 현대의 대표적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조차도 연구실에 들어갈 때마다
'주여, 이 문제에 대해 저에게 알려주세요'라고 기도를 올렸다지요.

금아, 야인슈타인에 대한 일화는 많아요.
이스라엘 건국 때 아인슈타인에게 초대 대통령을 맡아 덜라고 제안하니
'방정식equation 은 정치politics 보다 생명이 더 길다'라는 말로 거절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아인슈타인은 처음에는 원자탄 제조를 반대했지만 히틀러 때문에 원자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지요.

우암, 저는 가끔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고 하신 홍종인洪鐘仁박사께서 예전에 저에게 

'재순 군! 나하고 별구경 가자. 정치판에나 따라다니면 시야가 좁아져. 별을 봐야 해' 라고 해서

남산 과학관에 천재 구경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미국에 가면 뉴욕의 자연박물관에 찾아가 한없이 신비로운 천체 화면에 도취되기도 하지요.

몇 년 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 교수의 수상 이유는 뉴트리노 천문학의 창시라고 했습니다.
뉴트리노는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신비의 소립자로 알려졌는데,
초신성(超新星-별의 진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대폭발을 일으켜 태양의 천만 배에서 수억 배까지 밝아지는 별)에서 

나오는 아주 미세한 분자를 감지할 수 있는 탐지기를 만들어 이 뉴트리노를 관측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지요.

고시바 마사토시는 우주 방사선을 피하기 위해 
1천 미터 지하의 폐광 터에 5천 톤 규모의 물탱크로 된 실험 시설을 만들어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지요.
그 때가 1982년이었고, 
그로부터 20년 동안 한 우물을 판 결과 마침내 태양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우주 물질의 비밀을 파헤치는 떼 반드시 필요한 뉴트리노를 찾아낸 것입니다.

선생님,  이런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너무 엄청나서 저 같은 사람에게는 생각 밖의 이야기지요.
그 엄청난 일을 극히 미세한 뉴트리노의 발견으로 해낼 수 있다는 이런 점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분야에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충동과 꿈을 가지게 합니다.
선생님, 혹시 다시 태어난다면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있으신가요?

금아, 그런 생각은 없고 저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영문학자가 되어 지금의 생활을 되풀이하고 싶어요.
그 첫째 아유가 구속받지 않는 삶이기 때문이고, 돈에 집착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남하고 무슨 경쟁을 하거나, 
남을 딛고 내가 일어선다든지 남에게 해를 끼치고 내가 잘 된다든지  그런 생각을 안 하고도 살 수 있으니까요.
내 직업이든 살아온 환경이든 아무 불편을 못 느끼고 살았으니까요.

유암, 원스턴 처칠도 90회 생일에 기자들에게 같은 말을 했다고 하네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 나를 낳아주시면,
 내가 살아온 인생 꼭 그대로 조금도 가감 없이 살고 싶다.' 고 말이죠.

'지금 물고 있는 시가cigar도 계속 피우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아, 그럼 물론이지'라고 하며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했습니다.

처칠은 보아 전쟁 때 종군 기자로 참전을 했는데,
어느 날 전세가 불리해져 그가 속해 있던 소대에 퇴각 명령이 내려졌답니다.
퇴각을 하다가 문득 참호 속에 두고 온 시기가 생각나서 
소대원들과 떨어져서 시가를 가지러 갔다 와서 보니 소대원이 모두 죽어 있더라는 거예요.
그 애기를 들려주며 '이래도 시가를 피우지 말란 말이냐?'고 했다는 겁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처칠처럼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는 적이 있으신가요?

금아, 글쎼요.
내가 제일 고생한 때가 일제 치하인데 상하이에서 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어도 직업을 얻기가 힘들었어요.
학원 선생을 했는데 그것도 사상이 나쁘다고 못하게 해서 야단이 났었지요.
생활을 할 수가 없으니까.
친구한테 부탁을 해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경성중앙산업학원) 임시 교원으로 취직이 됐어요.

그때는 남자는 모두 전선戰線에 나가고 대게여자들이 남아서 일들을 하고 있을 때인데 
내가 영어도 하니까 취직이 된 거예요.
아침이면 국민복에 각반을 차고 출근을 하는데, 각반을 차면서 운적도 많았어요.

그러던 중 어느 날 강당에 모이라고 해 갔더니 여자들이 막 울고 있는 거예요.
일본이 망한 걸 제일 먼저 안 사람 중에 하나가 나일거예요.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그 일자리나마 없어져 집에 있는데 미군정이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미군 사령부에 취직이 되었지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 중에도 영어는 잘 하는데 공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떄 미군사령관이 락 하드란 사람이었는데 시카고 대학의 영문과 교수었어요.
그 사람이 나를 아주 잘 봐서 임시교원으로 있던 나를 갑자기 고등관으로 만들어났어요.
그런데 그때 또 전쟁이 끝난 후 한 달 만에 개교한 경성대학 예과 부장에게 누가 날 추천해서 취직이 되었던 거예요.

임시 고원에서 고등관이 되었지,
또 교수가 되었지, 그때는 세상이 다 내 것 같더라고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제자들은 옷은 남루할망정 머리들은 아주 비상했지요.
그래서 수업 들어가기 전에 난 혁대를 고쳐 매곤 했어요.
학생들이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르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아주 똑똑한 학생들이었는데, 내 무서움의 대상이었죠.

그러던 중 '국대안 반대 운동' 이 격렬하게 일어났지요.
사랑하는 내 제자들이 찬성하는 쪽에도 서 있고, 반대하는 쪽에도 서 있고 참 괴롭더라고요.
그래서 사표를 냈더니 '양심적인 교수, 사표 내다' 이런 식으로 보도되면서 갑자기 내가 좌익으로 여겨지게 됐어요.  
난감해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장리욱 선생이 찾아와서 '사표는 수리가 안 됐소, 

그러니 사범대학으로 오시오' 하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저는 서울대학교에 남게 되었지요.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친 일이 일생의 가장 큰 보람입니다.
그때 돈을 벌 생각이 있었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었지요.
당시 조선은행(現 한국은행)에서 관사도 주고 이사급으로 대우해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입사를 거절했고요.  

우암, 선생님은 운이 좋았다고 하시지만, 실력과 인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서울대와 인연을 맺으신 덕에 선생님께서는 몇 해 전에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을 받으셨지요.
그때 저는 서울대 총동창회 회장의 자격으로 축사를 했는데,
그때 선생님의 시 '이 순간'을 제 딴에는 멋있게 소리 높이 읊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그 동안의 삶에서 후회하시는 점도 있으신가요?

금아, 글쎄 지금은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딸아이를 너무 편애했어요.
우리 딸아이가 공부를 잘하니까 경기 여고와 이화여고 양쪽에서 모두 보내달라고 했지요.
이화여고 교장이 나하고 친구였는데 무슨 조건이든 다 들어줄 테니 저희 학교로 보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조건을 제시했죠.
학칙상 수업 일수의 3분의 2만 출석하면 되니 나머지 3분의 1은 결석을 시키겠다.
그 조건을 들어주면 우리 딸을 보내겠다.

우암, 왜 그런 조건을 제시하셨나요.

금아, 내가 데리고 공부를 시키려는 생각도 있었고 비가 오거나 몸이 조금만 좋지 않아도 학교에 안 보냈거든요.
과외 공부를 시킨 적도 없고 집에서 내가 가르쳤지요.
결석이 많아 학교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모의고사를 치르면 그때는 반에서 일등 하는 아이보다 한 바퀴는 앞섰지요.
서울대학교에도 좋은 성적으로 들어갔고요.

대학 졸업 후 딸 아이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지요. 
학비도 면제되는 좋은 조건인데 떠나기 전날 울면서 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간신히 달래놓았는데 공항에서 또 어떻게나 울어대던지요.
그런데 며칠 후 미국에 있어야 할 아이가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혼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딸 아이를 달래 다시 미국으로 보냈는데 한 달 만에 또 왔어요. 
그 짓을 세번이나 했지요. 
그 때 포기하고 보내지 않았더라면 일생 딸을 가까이 두고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말이예요.  (p57)
** 두 사람의 대화는 금아 피천득의 반포동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 이 글은 <대화>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피천득 김재순 법정 최인호 - 대화
대담 정리 - 황인희, 김동하
샘터사 - 200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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