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기 -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동천자이
사람들은 왜 자꾸 떠나느냐고 묻는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떠나느냐고.
엄마도 묻고, 절친한 친구도 묻고, 스치듯 만난 친구의 친구도 묻고,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자도 묻는다.
정말로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저 여행이 좋아서 간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직 고등학교에 다나던 시절에 어떤 책을 읽었다.
스무 살 시절에 꼭 해야 할 일들을 적어놓은 책이었다.
이젠 정확하게 책 제목도,
항목이 스무 가지였는지 쉰 가지였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구절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많은 곳에서 똥을 누어라."
동물들이 배설물로 영역을 표시하는 것처럼 세계 여러 곳에 배설물로 영역 표시하라는 말이다.
처음 여행을 갓을 때 이 글귀가 떠올랐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똥을 누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
그래서 나는 어느 곳에 가든지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아놓고 오는 버릇이 생겼다.
잠을 자고 몸을 씻었다면 아마 여러 가닥 이미 빠졌을 텐데,
배낭을 메고 돌아 나올 때 적당한 부위(언제나 부위가 달랐다)에서 뽑은 꼭 한 가닥을 뿌려놓고 왔다.
비행기에서, 거리에, 숙소에, 박물관에, 예배당에 그리고 수 많았던 카페에.
얻은 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의식이 행해졌다.
얻은 만큼 두고픈,
어떻게든 나의 한 부분을 그 곳에서 살게 하고 싶은 나의 객기.
극장에서 영화를 한 장면 찍고 나오는 마음과 같았다.
사진과 같은 기억을 추억으로 담아두고 싶어 그랬다.
그곳에서 아직 나의 수 많은 분신들이 살고 있다.
오늘은 사막의 별을 이불 삼아 덮고 있었던 바로 그 밤,
오늘은 좀처럼 모이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 잔뜩 모인 해변의 어느 밤,
오늘은 남의 트럭을 얻어 타고 달리던 햇살 좋은 그 길.
그저 나는 매일 그곳에 서 있고,
매일 새 발걸음을 내딛는다.
내가 겪은 일을 상대가 겪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가 겪은 일을 내가 겪지 못했다 하더라도 때때로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
여행이 가지는 힘이다.
때때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여행 이야기도 마치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기억에 관한 것이다.
나의 기억이 타인의 기억이 되기도 하고,
타인의 기억이 나의 추억이 되기도 하는,
여행과 영화가 가지는 힘이리라.
이 책의 모든 여행과 영화는 한 줄이 될 수도 있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이 자꾸만 미안해진다.
한 줄이 되고도 남는 마음을 한숨처럼 술 한 잔에 내려놓기만 해도 족하다.
※ 이 글은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안홍기 -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부표 - 2007. 06. 20.
'내가만난글 > 갈피글(시.좋은글.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신영복-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월 25일자 신영복 교수의 옥중 편지 (0) | 2008.03.25 |
---|---|
外篇 - 인의 덕성의 존중과 논리의 전개는 쓸 데 없다. (0) | 2008.03.22 |
레너드 제이콥슨-마음은 도둑이다/떠돌다 찾아올 '나'를 기다리며... (0) | 2008.03.07 |
박인식-TV동화 행복한 세상/나비의 용기 (0) | 2008.02.26 |
공지영-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나이를 먹어 좋은 일 (0) | 2008.02.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