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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 타인의 기억으로 남기

by 탄천사랑 2008. 3. 9.

·「안홍기 -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동천자이

 

 

 

사람들은 왜 자꾸 떠나느냐고 묻는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떠나느냐고.
엄마도 묻고, 절친한 친구도 묻고, 스치듯 만난 친구의 친구도 묻고,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자도 묻는다.

정말로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저 여행이 좋아서 간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직 고등학교에 다나던 시절에 어떤 책을 읽었다.
스무 살 시절에 꼭 해야 할 일들을 적어놓은 책이었다.
이젠 정확하게 책 제목도, 
항목이 스무 가지였는지 쉰 가지였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구절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많은 곳에서 똥을 누어라."

동물들이 배설물로 영역을 표시하는 것처럼 세계 여러 곳에 배설물로 영역 표시하라는 말이다.
처음 여행을 갓을 때 이 글귀가 떠올랐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똥을 누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
그래서 나는 어느 곳에 가든지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아놓고 오는 버릇이 생겼다.
잠을 자고 몸을 씻었다면 아마 여러 가닥 이미 빠졌을  텐데,
배낭을 메고 돌아 나올 때 적당한 부위(언제나 부위가 달랐다)에서 뽑은 꼭 한 가닥을 뿌려놓고 왔다. 

비행기에서, 거리에, 숙소에, 박물관에, 예배당에 그리고 수 많았던 카페에.
얻은 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의식이 행해졌다.
얻은 만큼 두고픈, 
어떻게든 나의 한 부분을 그 곳에서 살게 하고 싶은 나의 객기.
극장에서 영화를 한 장면 찍고 나오는 마음과 같았다.
사진과 같은 기억을 추억으로 담아두고 싶어 그랬다.
그곳에서 아직 나의 수 많은 분신들이 살고 있다.

오늘은 사막의 별을 이불 삼아 덮고 있었던 바로 그 밤,
오늘은 좀처럼 모이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 잔뜩 모인 해변의 어느 밤,
오늘은 남의 트럭을 얻어 타고 달리던 햇살 좋은 그 길.
그저 나는 매일 그곳에 서 있고,
매일 새 발걸음을 내딛는다.


내가 겪은 일을 상대가 겪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가 겪은 일을 내가 겪지 못했다 하더라도 때때로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
여행이 가지는 힘이다.

때때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여행 이야기도 마치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기억에 관한 것이다.
나의 기억이 타인의 기억이 되기도 하고,
타인의 기억이 나의 추억이 되기도 하는,
여행과 영화가 가지는 힘이리라.

이 책의 모든 여행과 영화는  한 줄이 될 수도 있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이 자꾸만 미안해진다.
한 줄이 되고도 남는 마음을 한숨처럼 술 한 잔에 내려놓기만 해도 족하다.
※ 이 글은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안홍기 -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부표 - 2007.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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